이원규 편집국 사회2부 부장

대동강물도 풀려 완연한 봄을 느끼게 된다는 경칩이다. 24절기의 셋째 절기인 오늘은 서양의 밸런타인데이처럼 우리의 토종 ‘연인의 날’이란다. 젊은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은행 씨앗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수나무와 암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졌단다. 내 것보다 남의 것 따라가기 바쁜 글로벌시대란다. 그래도 우리 것은 좋은 것, 옛이야기 끄집어내면서 오늘도 나는 글로 벌어먹는다.

지난 주말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오붓하게 모였다. 어머니는 돌아가는 지구를 끌어안기라도 하듯이 굽은 허리로 왔다 갔다 우리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매우 좋으신 모양이다. 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하고 강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품어주려 하는데 손이 모자라 어머니를 대신 보냈다는 설이 있다는데 진짜 맞는 말 같다. 형제 중에 필자만 어언 십수 년째 객지로 떠도는 유목민 신세다. 홀로 되신 어머님은 지금도 큰아들 걱정뿐이라서 출근할 때마다 어머님께 전화부터 하고 일터로 간다.

어머니는 내친김에 장(醬) 담글 준비나 해야겠다며 베란다에 매달아 놓은 메주를 내려달란다. 그 메주는 지난해 동짓달에 만들어 띄워 놓은 메주다. 곰팡이가 슬어 험상궂지만 아주 잘 떴다고 좋아하신다. 12간지 중에 말〔馬〕 날에 담가야 한단다. 애석하게도 3월 3일을 놓쳤으니 15일이나 27일이 좋단다. 물론 손 없는 날인 25, 26일도 괜찮단다. 메주는 푹 삶은 콩을 찧고 으깨 네모나게 뭉쳐 덩어리째 발효시킨다. 신세대들은 특이한 냄새 때문에 코를 막으며 꺼리지만 누가 뭐라 해도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1등 발효식품 중에 된장만 한 게 없다.

옛날에는 자랑스럽게 대청마루 끝에 메주를 짚으로 엮어 윗부분은 새끼로 꼬아 주렁주렁 매달아 곰팡이를 피게 했다. 우리 식생활에서 오래전부터 애용해온 된장은 한 해 동안 가족들의 입맛을 좌우하므로 부정 탄다고 함부로 아무 날이나 담그지 않았다. 설도 정월 대보름쯤이면 슬슬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택일이라고 해서 날을 잘 잡아야 장맛이 난다고 했다. 손이 없는 날(음력 9, 10일)은 물론이고 말 날 중에서도 달이 뜨지 않는 그믐쯤 날을 골랐다. 아무리 늦어도 제비가 날아오는 삼월 삼짇날 전에는 담가야 장맛이 제대로 난다고 굳게 믿었다.

따스하던 봄날이 되니 어릴 적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러니까, 아들로 둘째가 다섯 살 때쯤이었다. 넷째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무렵이니 어머니도 무척 피곤하셨을 때다. 우리가 나가 논다고 하니 어머니는 참으로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우리는 동네 앞 산소 앞에서 놀았다. 아뿔싸, 불개미 집을 건드린 개똥이가 사타구니를 벅벅 긁어댔다. 어머니는 개똥이 바지를 벗기고 부랄 밑에다 누런 된장을 잔뜩 이겨 발라주셨다. ‘개똥이’인 반려견이 아니다. 손이 아주 귀한 집안의 아들 이름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서 그 금쪽같은 자식을 맡기고 시장으로 나갔다.

시장이 파하고 아버지는 눈깔사탕을 사 오셨다. ‘웬 된장 냄새냐?’ 하시며 큼큼거리시며 어머니 한 알, 나와 여동생, 둘째 그리고 개똥이도 한 알 입에 넣어주셨다. 참고로 그때 눈깔사탕은 여섯 개 들이가 한 봉지였다. 우리는 개똥이 불알이야 어찌 됐건 침을 질질 흘리며 왕 눈깔사탕을 볼이 터지거나 말거나 입안에 굴렸다. 봄이 되면 일찌감치 홀로 가신 눈깔사탕 아버지가 그립다. 주말부터 시작해 어제까지 내린 비에 땅은 촉촉해졌다. 길거리에 나서면 저요! 저요! 소리치면서 명함을 건넨다.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꺾는다. 엊그제 방바닥에 내려놓았던 메줏덩어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잘 띄웠으니 제대로 된 장맛 좀 이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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