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인 처인구청 공원환경과장

사자소학에 ‘용모단정(容貌端正)하고 의관정제(衣冠整齊)하라’고 했다. 그 만큼 면학분위기 조성이나 정신자세에 교복의 중요함을 대변하는 대목이기도 하겠다. 

이 교복과 관련하여, 세상은 참으로 좋아졌다. 특히나 용인시 중고교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하는 말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중고신입생 2만3천여명에게 각 29만6000여 원의 교복구입비를 지급하는 시책과 관련 3월 2일부터 1주일간 지원신청을 받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시책이니만큼 사교육비 경감이란 실질적인 부메랑 효과를 냈으면 좋겠으며, 이제와 생각하니 교복에 대한 추억이 몇 가지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우선 나만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일찌감치 1972년 여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남한강가의 우리 동네는 여름이면 매년 물난리를 겪었는데, 그해는 몇 십 년만의 아주 큰 장마를 겪었다. 동네의 많은 흙벽돌집이 물에 잠기면서 맥없이 쓰러졌는데, 그나마 우리 집은 목골조 주택이라 전복은 안됐으나, 살림살이가 다 흙탕물에 잠기고, 벽이 다 허물어 졌다. 다른 집들과 같이 구호물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 때 나는 내게 맞는 회색바지를 공짜로 받아, 그해 겨울까지 그 바지 단벌로 지냈는데 그 이듬해 중학생이 되어 하복바지를 보니, 구호물품으로 받았던 그 바지가 하복이었음을 알았다. 겨울에 하복을 입고 다녔던 것이다. 그때야 모르고 지냈지만, 지금 새삼스레 무상교복의 복지사회가 되고 보니 맘속 저 편에 씁쓸히 눈물이 어린다. 그렇지만 내가 무상교복 혜택의 원조일지도 모르겠다고 자위해보고도 싶다.

두 번째는 정말 슬픈 교복이야기가 되겠다. 우리 집은 5남매다. 내가 고교 3학년 때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목수 일을 하시는 선친에게는 호구책도 버거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나마 맏이라고 교복이고 수업료고 수월하게 대 주셨다. 허나 한창 어려운 시절이라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야구공 꿰매는 공장을 다녀 학비를 마련해 중학교를 또래들보다 1년 늦게 진학했다. 문제는 다음 이었다. 입학은 했으나 그 당시 가정형편이 상당히 어려워 입학 한 달여를 교복과 책가방 없이 사복에 초등학교 때의 책보자기로 등교를 했다. 등굣길이 같아 가끔 여동생을 보았는데 여동생만 교복과 가방이 없이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창피하단 생각만 들었는데, 그 당시 부모님의 억장이 수천 번은 무너졌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타임머신이 있다면 지금 교복구입비를 신청하여 그 시대로 돌아가 멋지게 구입해주고 싶었다. 그리 어렵게 자란 여동생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생질들의 효도 받으며 시모님 모시고 잘 살고 있다. 

세 번째는 교복만 보면 속 터지는 7년 전 경험담이다.
딸아이가 청운의 꿈을 품고 인근 지자체 외지 여고로 진학하였는데, 기숙사에 적응하지 못해 입학 일주일 만에 관내 학교로 전학시켰다. 1주일 입고 전 학교에 무상으로 증여하고 온 교복과 전학 온 학교의 교복이 그 당시 각각 40만원으로 총 80만원이 들었다. 40만원은 말 그대로 떡 사먹은 격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대학교 1학년 초의 자취집에는 상고를 다니는 3학년  여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숙제하다말고 다짜고짜로 내게 교복이 영어로 뭐냐고 물어보았다. 영어실력이 출중하지 못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못하고 소지한 영한사전을 뒤적이니 ‘School Uniform’이라고 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 당시 즉답을 못하여 너무나 쪽팔렸었다. 그것도 1년후배 여학생 앞에서.
 
이상으로 용인시의 전국최초 무상교복 구입비 지원과 관련하여, 내가 살아오면서 나를 아프게 했고, 부모님의 가슴을 쥐어짜게 했고, 나의 속을 쓰리게 했으며, 어느 대학생을 쪽팔리게 했던 교복의 추억들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신학기를 맞는 관내 입학생들에게는 말 그대로 청운이 활짝 피어나는 교복이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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