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미술관 정원에는 광개토왕비 모형이 세워져있다. 본래 광개토왕비는 중국 길림성에 있다. 비문에는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고구려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고 군사력이 최강이었다. 비문에는 “무위가 천하에 떨치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작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길림성은 예전 고구려가 호령하던 곳이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 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2년(414년)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도읍인 국내성,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통구성에 세웠다. 높이는 6.39미터로 한국 최대의 크기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를 새겼다.

비문 가운데 이른바 신묘년 기사를 일본은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함으로써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이 나오게 되었다.

비가 발견된 것은 청(淸)의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이 해제된 이후 일이다. 만주족인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를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했는데 집안 일대도 그에 포함됐다. 1877년 청나라 광서 3년,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나 1928년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 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1982년 중국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각 안에서는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고국양왕(故國讓王)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다. 광개토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중국은 광개토왕비를 현존 최고(最古), 문자가 가장 많은 고구려 고고사료로 중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중심문물로 동북아 고고유적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유문자가 없고 광개토대왕비문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다며 중화왕조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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