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서 의병 조직하려다 무의도로 유배

지난 1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독립운동가 이동휘(李車輝·1873∼1935) 선생의 8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우리는 지금 충직한 군인이었으며, 근대 교육의 선구자였으며, 열렬한 기독교 전도사였으며, 그리고 독립운동의 지도자셨던 성재 이동휘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의 자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다. 그는 8세 때부터 향리 대성재(大成齋)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세 때 지방관장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을 지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인천과도 인연이 깊다.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대장을 지냈으며 보창학교를 세웠다. 그는 무관 출신이긴 했으나 교육문화 사업에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朴能一) 목사를 움직여 강화도에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하였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6년 오상규(吳相奎)·유진호(兪鎭浩) 등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계몽 단체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1908년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일본의 강제병합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광복군정부 정도령, 한인사회당 위원장, 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지낸 독립운동사의 거목이다.

그는 조선말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명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강화 진위대장으로 부임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후 각 지방에는 진위대가 세워졌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역을 담당하는 향토사단인 격이었다. 그러나 진위대가 지역의 군사를 담당하기에는 이미 나라의 세가 많이 기울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를 이끌어 왔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에 분노, 1909년 3월 군대 동지인 연기우·김동수 등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가 잡혀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한국 외교권이 일본의 강제 수호조약으로 박탈되고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한국군이 해체된다는 것을 알고 조국 광복을 위하여 최후의 한사람 까지 싸워야 한다고 연설하고,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용일 목사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였다. 강화군 최초의 교육기관 이었다. 강화도에서 보창학교 외에 72 학교를 설립했다.

나라가 망해가자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에는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 등과 105인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5년경 노령(露領)으로 망명, 거기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1919년 8월 말경에는 김립(金立)의 사위인 오영선(吳永善)을 데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취임 후 자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인사까지도 끌어들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발전해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하였다.

만주·간도 방면의 독립운동 무장단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1920년 말에는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에게 쫓겨 밀산(密山)을 거쳐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퇴각할 때 긴급구호금으로 1만 원을 보냈다. 비록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민족독립이 최우선이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공산당원 이용선의 흉탄에 맞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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