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5년 머물며 철도와 조폐 군사 등 공업 견학 연구

하기 조슈파이브 플래카드

1860년대 일본은 서양 알기에 열을 올렸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미국과 유럽을 앞다투어 견학했다. 1863년 6월 일본 변혁의 중심에 있는 조슈번 출신의 젊은이 5명이 밀항 형식으로 영국 유학길에 나선다. 훗날 이들은 일본 근대화에 많은 발자취를 남겨 ‘조슈 5걸’‘ 조슈 파이브’라 불린다. 이때 만해도 막부 시절이기에 막부의 허가없이 외국을 나가는 것은 위법이었다. 그러나 막부의 권한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조슈번이 일어서는 시대였기에 특별한 제재는 없었다.

‘조슈 5걸’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오 요조,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를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훗날 강화도 조약의 부대표와 명성황후 시해에 깊숙이 간여했던 인물이다.

5명 모두 모두 20대의 나이였다. 이들은 영국을 방문해 선진 문물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가기전 서양을 물리쳐야 한다는 양이의 정신은 사라지고 서양 문물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5명은 6개월부터 5년간 영국에 머물면서 영국의 철도와 조폐, 공업기술 등을 배웠다. 런던의 잉글랜드은행본점의 견학자 명부에 서명도 남겼다. 그런 경험과 지식을 그 후 일본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수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초대 외무장관이 되어 5명 모두 메이지 정부의 요직에 있었다.

영국 방문을 주도한 사람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처음 계획은 세 명이었다. 중간에 서양에 가보고 싶었던 이토가 합류했고 마지막으로 엔도가 포함됐다. 하급무사 출신으로 처음에 두각을 보이지 않던 이토는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노우에게 자신도 포함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기 조슈파이브 이토 소개글

이들은 영국 무역상으로 일본에 무기수출을 하는 토머스 글로버(오페라 풋치니의 나비부인의 실제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선원으로 가장해 아편 선박을 타고 상하이로 간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서구 열강의 군함과 서양 건물이 웅장하게 늘어선 것을 보았다. 당시 상하이는 아시아 최대의 서구 문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들은 상하이의 번영과 100척 이상의 외국 군함과 기타 증기선을 목격하고 ‘양이’는 무모한 짓이며 서양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영국행은 고달팠다. 우선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이 이노우에밖에 없었다. 상하이에서 이들은 이화양행 상가를 찾아가 영국행 선박을 부탁했고 담당자는 영국 방문 목적을 물었다.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선장으로부터 항해술을 배우게 되어 고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돛을 펴고 접는 일부터 갑판 청소까지 잡무를 처리했다. 음식은 입에 맞지않는 비스킷과 고기뿐이었다. 이토는 설상가상으로 물까지 맞지 않아 설사까지 했다. 선원용 화장실이 따로 없어 갑판에 올라 바다로 나와 볼일을 봐야했다. 일본인을 ‘쟈니스’라고 불리며 경멸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런던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토와 이노우에는 일본 국내 사정으로 불과 1년도 못돼 먼저 귀국하게 된다. 1863년 5월 조슈번은 양이론에 근거해 외국 상선을 포격하도록 조장했는 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4국함대가 시모노세키에 쳐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 전쟁의 통역에 나서면서 중재 역할을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5사람은 모두 중책을 맡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5명이 유학했던 런던 대학에서 ‘조슈 파이브’(Choshu Five)로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사실을 안 서일본 국제교류 추진협회가 2003년에 야마구치 시에도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서는 이노우에는 외교, 엔도는 조폐, 야마오는 공학,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 이노우에 마사루는 ‘철도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2006년 이 5명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조슈 파이브’가 제작됐다.

하기 조슈파이브 5인 단체사진

초대 총리 외무상 철도청장 등 요직맡아

▲야마오 요조(山尾庸三·1837~1917)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1863년 27세에 영국으로 밀항. 1863년 영국으로 밀항 유학하여 조선 기술을 배우고 1868년 귀국하였다. 메이지신 정부의 관료가 되어 공부대학교(도쿄대학공학부의 전신)와 맹아학교의 설립에 힘을 쏟고 1880년에 공부경(공부성 장관)이 되었다. 일본공학회 회장을 36년간 역임하고 일본의 공업. 공학발전의 기초를 쌓았다.공부경(공업의 아버지)가 된다

▲엔도 긴스케(遠藤謹助·1836~1893)

28세인 1863년 영국 유학해 1866년 귀국. 귀국 후 영국함대사령관 킹제독과 회견에서 통역을 하는 등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신 후 메이지 정부에 재무관료 활동한다. 1881년 오사카 조폐국장이 되었고 외국인 기사에 의존하지 않고 양식신화폐의 주조에 성공하였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1834~1910)

항해술과 영어를 배우고 21세인 1863년 영국에 유학, 1868년 귀국한다. 영국에서 광산, 토목공학을 연구한다. 귀국후 메이지 정부의 철도두가 되었고 일본 최초의 심바시, 요코하마 사이의 철도 개통에 힘을 쏟았다. 그 후 공부대보, 철도청잔관 등 역임하고 전국의 철도망 정비, 철도에 전 생애를 바쳤다.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5~1915)

하기시 출생으로 29세인 1963년 영국으로 밀항, 이토와 함께 중도 귀국한다. 메이지 정부 초대 외무경이 되어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고 로쿠메이칸시대를 만든다. 1885년 제1차 이토 내각의 외무대신이 돼 일본의 국력 신장에 손발을 맞춘다. 내무, 재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강화조약 부대표로 활동했으며 명성황후 시해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23세로 영국에 밀항, 일본 최초 내각총리대신이 됨. 중도 귀국해 시모노세키 전쟁을 중재한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서 구미시찰에 나선다. 초대내각총리대신, 추밀원의장 등 요직을 역임하고 일본 메이지헌법의 제정을 주도한다. 20세기 대표적인 외교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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