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사회2부 부장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이라서 민속씨름은 볼 수 없었지만, 이름도 낯선 ‘스켈레톤’ 경기를 점심 후에 가족 모두가 보며 응원했다. 태극기가 그려진 주먹으로 바닥을 힘껏 내려치고 달린 ‘돌아온 아이언맨 윤성빈’ 선수가 값진 금메달을 따내며 그야말로 세계 천하장사로 등극했다. 썰매에 납작 엎드려 구불구불한 트랙을 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통쾌하다. 문득 어린 시절에 동구 밖 언덕에서 비료 포대로 미끄럼 타며 놀던 때가 생각났다. 또 하나, 맷돌처럼 생긴 둥글넓적한 돌을 굴리는 여자컬링 경기도 볼만했다. 엊그제는 일본에 아깝게 패했는데, 세계랭킹 1위와 2위인 캐나다와 스위스를 연달아 격파했으니 참으로 장하다. 그 옛날 할머니께서 맷돌 돌려 콩을 갈던 그 힘이 전해지지 않았나 싶다.

올해가 양력으로는 한 달 반이나 지났건만 역시 설날이 지나야 비로소 새해다. 객지로 흩어졌던 내 모습을 닮은 형제들이 그들의 식솔들을 이끌고 부모님 계시는 고향으로 찾아왔다. 설날 전날에는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았든지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는 올해 대박이 났다. 부산으로 시집간 막내딸이 쌍둥이 남매를 출산해서 이제는 ‘할아버지’ 반열에 올라섰다. 스마트폰에 올린 손주들 사진을 자랑삼아 크게 키워 보여줘도 조금도 흠이 되지 않았다. 그뿐이랴. 필자의 입은 아는 사람들만 앞에 서면 저절로 찢어져서 귀에 걸려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늘어난 식구들 탓에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새우잠을 잤어도 개운한 설날 아침이다. 제일 먼저 일어나신 어머니는 무엇을 그리 챙기시는지 굽은 허리를 더욱 굽히시고 새벽부터 분주하시다. 저세상으로 일찌감치 떠나신 아버지에게 올리는 차례상(茶禮床) 때문이다. 늘 하시는 말씀으로야 간략하게 준비하셨다지만, 상 위로 올려놓으면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쓰는 지방은 언제나 필자의 몫이다. 이번 설에는 붓펜이 술술 풀려 필체가 제대로 나온 듯하다.

“큰애야! 천천히 해라. 니 아부지 식사 빨리 못하잖아.”

등 뒤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호통을 치신다. 깐에는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서 급하게 서둘렀던 모양이다. 차례를 끝냈고, 식사도 마쳤다. 조카들은 세뱃돈 받을 욕심에 내 눈치부터 살핀다. 둘째 동생이 “다 크면 세뱃돈 내고 하는 거 알지?”하면서 조카들을 놀린다. 앞서서 우리가 어머니께 세배하고 각자 용돈을 드렸기 때문이다. 막냇동생이 조카들 편을 들어주면서 “공부 끝내고 이다음에 취직하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이웃 어른들까지도 찾아뵈었는데, 세상이 바뀌면서 세배는커녕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산다.

제기차기, 자치기, 팽이치기, 널뛰기, 연날리기, 척사대회도 특별한 행사 때 이외에는 보기 힘들어졌다. 예전에 우리가 어릴 적에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깡통에 관솔 담아 논두렁길을 뛰며 놀았다. 그때쯤이면 어머니는 메주로 장을 담그셨고, 뒤란의 장독들도 반들반들 윤이 났다. 속담 중에는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안 믿는다.’라는 그 장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말한다. 수많은 장(長)들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라는 말이야 진심을 믿어달라는 뜻이겠지만, 여태껏 손가락에 장을 지진 장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말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순진한 사람들이 ‘팥으로 메주 쑨다’ 해도 믿었기 때문이다. 벌써 여기저기서 ‘가즈아∽’ 외치는 자들도 늘어났다.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라면서 목청 높이며 핏대를 올리게 될 것이다. 핏빛 장미꽃 만발하는 6월이 되면 또 한 번 팥으로 메주를 쑤게 될지도 모른다. 거짓말도 찰떡같이 믿고 사는 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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