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3.1운동 기념비.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제의 엄청난 폭력적 탄압의 결과로 나타났다. 수원의 3․1운동이 공격적인 양상을 띠며 일본 순사들이 시위 군중들에게 처단되자 일제가 폭력을 강화한 것이다. 3․1운동의 주동자 체포와 수색을 빙자로 일제는 살인․방화․구타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우정․장안면과 발안장터 시위의 연계를 내란 상태로 판단, 3․1운동 주동자들을 모두 처단하려고 했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했고, 4월 15일 순사보 조희창과 사사카 등의 안내 속에 제암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3․1운동의 주동자로 파악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20여 명을 살상하고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하는 만행이 이어졌다. 제암리 지역의 청년들과 주민들이 교회 안에서 불타 죽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들도 총에 맞아 죽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여인들과 아이들은 순식간에 가정을 잃었고 삶의 터전도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제암리 희생자들 중 23명이 현재 화성시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뒤의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고주리에서 숨진 김흥열 일가의 묘소는 살해 현장인 고주리에 있다. '제암리 학살'은 나라를 빼앗기고 갖은 탄압을 받던 주민들이 항거를 하다 맞은 참변이다. 이는 수원이 다른 지역보다 강한 독립 의지를 내보인 증거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