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손돌 억울한 죽음 전해와… "기압 차 냉기류 확장"

올겨울 강추위 기세가 대단하다. 전국 한파가 동장군의 위세를 실감나게 한다. 강화도도 추위에 관해서는 빠지지 않는다. 통상 음력 10월 말이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몰아닥치기 시작한다. 절기로는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 즈음이다.

뱃사람들은 이때 불어오는 추위를 '손돌 추위'나 '손돌 바람'이라 부르며 배 타기를 꺼렸다.

이런 내용은 조선시대 정조·순조 연간에 활약한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음력 정월부터 12월까지 당시 풍속을 월별로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년) 중 '기타 10월 행사'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달 20일에는 해마다 큰바람이 불고 추운데, 그것을 손돌바람[孫石風]이라 한다. 고려 왕이 바닷길로 강화도에 갈 때 뱃사공 손돌이 배를 저어 가다가 어떤 험한 구석으로 몰고 가자 왕이 그의 행위를 의심하여 노해서 명령을 내려 그의 목을 베어 죽여 잠시 후에 위험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손돌목[孫石項]이라 한다. 손돌이 죽임을 당한 날이 바로 이날이므로 그의 원한에 찬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내용은 홍석모와 동시대를 살다간 학자 김매순이 열양(洌陽), 곧 지금의 서울 일대 세시기로 정리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중 10월 20일 대목에도 있다.

"강화 바다에 험난한 암초가 있어 손돌목이라 한다. 방언에 산과 물이 험난한 곳을 목[項]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라는 사람이 있어 10월 20일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으니 마침내 그 이름을 따서 지명을 지었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고 매섭게 추워 뱃사람들은 조심하고 삼가며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하고 근신한다."

이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 역시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구체적이다.

고려 23대 고종이 몽골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하던 때였다.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새인 광성보를 지나자마자 뱃길이 막혔다.

초조해진 왕이 행차를 재촉했지만 뱃사공인 손돌은 침착했다. 그저 "지형이 막힌 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가면 뱃길이 트인다"고 아뢰었다.

고종은 자신을 붙잡아두려는 사공의 흉한 계략이라 여겨 손돌을 참수하라 명했다. 손돌은 죽음 앞에서도 조용히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는 바가지가 떠가는 데로만 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 일렀다. 결국 왕이 손돌이 가르쳐준 대로 바가지를 띄워 무사히 강화에 발을 내딛자 어디선가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비로소 잘못을 깨달은 왕이 크게 뉘우치고 말 머리를 베어 손돌 넋을 제사 지내니 그제야 풍랑이 그쳤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 뱃길 목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해 '손돌목'이라 부르고, 그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했다. 이곳은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가장 좁은 해협이다.

손돌목은 강화해협 중간쯤에 있다. 강화도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까닭에 이 해협은 어쩌면 바다라기보다는 큰 강처럼 보인다. 이 손돌목 지점에서 강화도와 맞은편 김포는 지그재그 형태로 땅이 어긋나게 돌출했다. 이런 곳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수로를 보호하며, 이를 통한 적군의 침투를 막기 위한 군사시설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손돌목 북쪽 강화해협의 더 좁은 지점 중 김포 쪽에 그 유명한 문수산성이 위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손돌목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 방면에는 덕포진이 있고, 맞은편 강화도에는 손돌목돈대가 있다. 손돌목돈대 바로 북쪽에는 광성보라는 별도 보루 시설이 하나 더 있다. 이는 그만큼 군사적인 관점에서 손돌목 일대가 중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무대로 하는 근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다. 당시 손돌목은 조선군 350여 명을 삼킨 원혼의 바다였다. 그들은 또 다른 손돌이었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