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후 존왕양이 운동 벌어져… 메이지 천황 시대로

일본은 1854년 미국과 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개국했다. 섬나라 일본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고수해왔다.

19세기 들어 일본 주변에도 외국 선박들이 많이 출몰한다. 일본은 1825년 이른바 ‘이국선타불령(異國船打拂令)’이라는 외국 선박 격퇴령을 공포했다. 말 그대로 외국 선박이 일본으로 접근해오면 발포해서 일본 바다 밖으로 내쫓으라는 명령이었다.

1837년 미국 상선 모리슨호가 조난당한 일본 표류민 7명을 태우고 일본 우라가만에 나타나 막부에 통상을 요구한다. 일본은 포를 쏘며 미국 배를 물리친다. 이때 미국은 일본을 ‘반미개 약소국’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무력 사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853년 6월 선체를 검정색으로 칠한 미국 군함 4척이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만을 통과하고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정박했다. 군함을 몰고온 선장인 페리제독은 멕시코 전쟁에서 함대사령관을 역임하고 동인도함대사령관 겸 견일특사에 임명돼 일본을 찾았다.

우라가는 막부의 방위 거점인 요충지역이었다. 바다에서는 일본 무사 60여 명이 포격 훈련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양에서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목선이었다. 일본인들은 배의 색깔이 검다고 해서 구로후네(흑선·黑船)라 불렀다. 이 배는 종전의 목선과는 규모나 속도, 모양새 등에서 전혀 다른 증기선(일본식 발음 조키센)이었다. 미국은 4척 중 2척은 증기 군함으로 기함인 사스퀘하나호는 2450톤으로 쾌속 외륜식 군함이었다.

미국 군함 무력 시위는 일본인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페리 함대는 “배는 미국 배이고 대통령이 쇼군에 보낸 서간을 지참하고 있으니 일본 고관 아니면 교섭하지 않는다”고 일본측에 통보했다.

훈련 중이던 일본 중하급무사로 실무자인 요리키 나카지마는 “일본 국법에는 고관이 이국선에 응대하는 조항없다” 고 답변했다. 이에 페리는 작은배를 타고 상륙해 실력 행사 의지 밝혔다. 요리키는 거듭 “법 어길수 없다” 는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요리키는 미국 기함 승선을 허락 받고 배를 구경한 뒤 기가 질린다. 요리키는 훗날 조선과 항해술 수업을 받아 막말 서양식 군제개혁 지도자가 된다.

막부는 마침내 미국측의 서한을 수리키로 결정한다. 받아들인 이유는 일본과 유일하게 통상행위를 하고 있는 네덜란드 국왕의 충고(1844년 개국 권고와 별단풍설서) 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어 서양의 군사력이 대단하다는 점을 고려했다. 별단풍설서는 네덜란드가 매년 일본 막부에게 보내는 문서로 유럽의 외교 정세와 세계의 흐름을 담고 있다. 일본으로는 매우 유익한 정보였다. 이 별단풍설서에 미국 함대가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도 담겨있었다.  해상 운송이 막히면 1주일안 일상 생활이 어려움에 빠지게 되고 함상에서 포가 발사되는 순간 도심이 쑥대밭이 될 것을 우려됐다.

페리제독은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고 내년 다시 오겠다고 통역을 통해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다. 일본측은 미국 군함에 올라 증기선과 최신식 무기를 보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일본측의 입장을 확인한 미국은 1854년 1월 미 함대 7척 에도만 내 가나자와 앞바다에 들어온다. 미국은 교섭과 함대 항진 시위를 반복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그 해 2월초 일본 전권과 미국의 정식 교섭이 시작됐다. 페리는 “17년전 모리슨호 사건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유감이다. 일본은 매우 어질지 못하며 멕시코 전쟁때 우리는 수도도 점령했다”며 협박했다. 이에 일본 대표도 “우리도 당당하게 전쟁할 수 있다. 일본은 불인하지 않는다. 17년전 사건을 꺼내는 것은 억지”라고 응수했다. 미국의 통상요구에 일본은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여러 차례 협상이 진행된다.

1854년 2월 10일~3월 3일 여러 차례 협약 끝에 미일화친조약 전12조가 체결된다.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의 개항과 영사 주재, 최혜국 대우 등이 결정됐다. 영사 주재를 놓고 대립했으며 최혜국 대우도 일본은 잘 몰랐다. 통행 유보 범위를 7리로. 막부는 유보범위 축소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훌륭히 학습했다. 이 방법을 조선에 똑같이 써먹었다.

미 해병대 300여 명이 상륙해 6월 9일 서한 접수식이 진행됐다. 미국은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필수인력만 배에 남겨두고 모든 병력이 상륙했다. 군악대가 연주를 했으며 페리 제독이 당당히 상륙했다.

일본도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에도 인근의 다이묘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5000명의 병사를 집결시켰다.

이후 1858년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자주권을 빼앗긴 불평등조약을 맺은 것이었다. 막부는 쇼군 후계자까지 일방적으로 정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거나 처형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안세이 다이코크(安政大獄)라 한다. 100명이 넘는 반대파가 처형됐다. 막부는 조약을 반대한 반대파나 비판자들을 처형했다. 개항을 부르짖었던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요시다쇼인도 이 때 처형된다.

개항과 미국과의 통상조약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尊王洋夷, 천황을 받드고 외국을 물리침)를 외치며 무력 행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사쓰마와 조슈 등 혈기왕성한 20대 사무라이들이 중심이 됐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들중 한명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천황이 있는 교토로 모여들었다. 막부가 있는 에도는 더 이상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존왕양이를 부르짖는 사무라이들은 암살과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가장 급진적인 사무라이들은 조슈번 출신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외국인들을 습격, 살해하고 존왕양이를 반대하는 일본 측 인사들에게도 테러를 가했다. 막부에게도 양이를 결행할 것을 요구해 이를 받아냈다. 시모노세키를 지나는 외국 선박에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연합함대 공격에 사무라이들의 활동을 실패로 끝난다.

존왕양이파는 서양과 무력 대결을 펼친 끝에 힘으로는 안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오랫동안 으르렁댔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1866년 협조체재를 구축해 막부에 저항한다. 병기를 구입하는 등 군사력도 한층 강화한다. 1868년 조슈와 사쓰마는 막부타도를 외치고 천황 정치를 내거는 왕정복고령을 발표한다. 이로서 막부시대는 끝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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