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문학관 인문학 아카데미, 장석주 시인편

기형도문학관 기향도 관장과 함께한 장석주 시인

기형도문학관에서는 인문학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으로 ‘기형도 시 새로 읽기 문학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임우기 문학평론가, 조동범 시인에 이어 어제 6일 2시부터 3시 반까지 장석주 시인을 초청한 강연이 진행됐다. 8일은 박덕규 교수가 같은 시간대에 강연한다.

강연 시작이 임박해 수능을 끝낸 100여 명의 광휘고, 광명북고 학생들이 인솔하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인사말을 끝낸 기향도 관장이 맨 뒤로 밀려나 접의자에 앉을 정도로 3층 강당은 빈틈없이 꽉 찼다.

‘기형도-그토록 불길했던 상상력의 끝 간 데’라는 주제로 강단에 오른 장석주 시인은 “기형도는 제가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흠 없이 깨끗한 사람이었지요.”라면서 첫 말문을 떼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다. 이어서 “1989년 3월 7일, 아침을 먹다가 기형도 시인이 죽었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불과 한 주일 전에 얼굴을 봤었는데…, 그때 도저히 믿기 힘든 충격과 함께 머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제2의 윤동주 신화였다.”라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은 28세, 기형도 시인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윤동주 시인이 사망한 2월 16일에 기형도 시인이 출생했으니 부활이나 다름없다면서 둘 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시대의 틈에서 생긴 울분은 중얼거림의 시, 독백의 시가 됐다고 말했다. 무엇이 이 20대 젊은이에게 이토록 어둡고 불안한 말들을 내뱉게 했을까. 지금도 기형도의 시는 숱한 젊은 시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시적 영감과 자양분을 주고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시를 읽으면서 해석이 잘 안 되는 단어와 구절이 있다”라는 질문에 장석주 시인은 “기형도의 시는 가용어휘가 풍부하다. 각자의 정서와 감각으로 읽어야 한다. 시는 수많은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읽으면 안 된다.”면서 “될 수 있으면 시를 통째로 외워라!”라고 명쾌하게 답변해줬다.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당선 이후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동아일보에는 문학평론이 입선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나와 40여 년 이상을 오직 책과 함께 살아온 ‘장석주’라는 이름 앞에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출판기획자, 인문학 저술가, 독서광, 장서가, 대학교수, 방송진행자 등 수많은 호칭을 붙이지만, 그는 시인과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로 불리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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