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臣으로 왜적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

이시무(李時茂)는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으로 판결사 직(職)을 수행했으며, 광주(廣州)에 기거했으니 지금의 강동구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이가 60세가 넘은 이시무는 자신은 질병이 있어 사실상 전장(戰場)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정립(廷立, 병조참판)이 임금을 수행할 때에 부친은 늙고 병이 있다는 실정을 애절하게 진술하니, 왕은 고향에 돌아가서 몸조리를 잘 하라고 특별히 허락하였다. 이것 또한 아들이 지극한 효성으로써 임금을 감동시킨 까닭이다.
판결공은 임금을 수행하는 그 아들을 눈물로 보내면서

"신하된 사람이 의를 위하여 순절(殉節)하는 것은 본분에 당연한 것이다. 어찌하여 순절한 집의 자손들은 반드시 나라에 보고하여 정려(旌閭)를 받으려 하며 이를 비문에 새겨서 후세에 자랑하려 하는가? 지금 내가 선산(先山) 밑으로 피난가지만 그곳은 깊은 골짜기도 아니며, 또 서울과 가까운 곳이다. 더구나 나는 국왕의 신하로 일반백성과는 다르니 만일 후일에 갑자기 왜적을 만난다면, 적들은 반드시 항복을 받으려 할 것이고, 나는 스스로 목숨을 바칠 것이니 너는 후일에 나의 사실을 부디 나라에 알리지 말고 또 비문에 새기지 않게 하라“ 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선산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광나루의 남쪽으로 집 뒤에는 산기슭이 가파르게 솟아있고 위에는 편형한 대가 있으며 한강이 가로질러 있다.
공은 그 대(臺)를 ‘첨신(瞻宸)’이라 부르고,그 마을을 우모골(廬幕谷)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의 우모는 '산소 가까이 있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첨신은 임금께서 행차하신 곳을 바라보는 뜻이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조하(朝賀)때 입던 예복(禮服)인 조복(朝服)을 입고 산대에 올라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여 임금을 수행하는 일을 대신하는 심정을 나타내었다.

같은 해 2월 열여섯 명의 왜놈들이 군복차람으로 이시무가 대를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항복을 하라고 위협했다. 공은 큰 소리로 “조선의 대신으로 섬나라 오랑캐에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고 왜적을 꾸짖어 소리가 산 밑에 본집까지 들렸다.

가족들은 모두 놀라서 허겁지겁 산대 동쪽까지 올라 언덕 숲 사이에 숨어 공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왜놈의 겁탈을 피해 모두 강물에 뛰어 들어가 죽음을 택하기를 자기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다.

이때 공을 따라 죽은 사람은 공의 부인 전주 이씨 의원군(義原君) 억(億)의 딸과 차남(次男)의 아내 경주 김씨, 공의 손자(孫子) 여산 군수 현담의 아내 광주 안씨 광양군(廣陽君) 황(晃)의 딸과 아직 출가하지 못한 손녀인데, 손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서 그 후에 이 집안에서는 암사강의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밖에도 차남 정견(廷堅)이 더 있다. 공을 따라 갔다가 공이 화를 당할 때 적의 창에 찔려 땅에 쓰러졌다가 적이 물러난 후에 요행히 다시 살아났으나 여러 장례를 치르고 난 지 석달 만에 창독(瘡毒)으로 인해 죽었다.

충신의 집안에서 줄줄이 효자와 효부에 효손까지 나왔으나 하루에 다섯 사람이 죽고, 뒤따라 또 한 사람이 죽어 일문육상(一門六喪)을 당하니, 나라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이시무의 뜻과는 달리 정문(旌門) 건립의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말의 비석이 있다. 바로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위치한 의마총(義馬塚)이다. 

이 비석은 자신이 모시던 장군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측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자 3일간을 달려 장군의 집에 도달해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죽음을 맞이한 충성스러운 말을 기리고 있다.

이 충성스러운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은 18세에 군인이 됐다. 본관은 연안, 이선경의 자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따라 출정해 1597년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품직을 제수 받았다. 
 
과거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5개의 부족이었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대륙으로의 확장을 꾀하며 명나라를 공격했다. 이 시기 광해군은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선 명과 대세로 떠오른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시행했는데 당시 명은 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지원군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명에 구원군을 보내며 강홍립 원수에게‘섣불리 군을 움직이지 말고 이기는 쪽에 가담하라’는 밀지를 내렸는데 대명의(大明義 )에 충실한 선봉군과 밀지에 얽매인 본군이 갈리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때 이유길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의 부장으로 함께 명에 파병됐다.

1만3천명의 우리 군이 파견됐지만 조선 원군은 1619년 심하의 후차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이유길 장군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죽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글 5자 ‘3월4일사(三月四日死)’를 써서 말에게 매주고선 채찍질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산과 강을 건너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장군의 전사를 알리곤 슬피 울다 쓰러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광해군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과 의마총은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에 위치하는데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으나 이유길 장군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어 가묘로 조성돼있다.

사당 옆에는 연안이씨의 종손 이봉길씨가 살고 있어 설명과 함께 묘역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넓은 공터 옆에 신도비가 있고 왼편으론 이유길 장군의 불천위(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하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보관하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가 모셔진 부조묘(불천위를 모신 사당), 청련사가 있다. 이유길 장군의 활약과 교지 등이 담긴 ‘연안이씨 이유길 가전고문서’는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으며 후손 이호룡 가에 소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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