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의 용문면 통로로 생천1리와 생천2리의 경계지점에 달우리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달울고개, 달부리고개, 닭우리고개(鷄鳴峴), 계현(鷄峴)이라고도 부른다. 고개의 정상에는 큰 노송(老松)이 서 있으며, 주위에는 돌로 채워져 있다. 

생천리와 용산리 주민들은 이 노송을 서낭당으로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두사충(竇士沖, 杜師聰)이 이 고개를 지나 금당실(金塘室)에 이르러 말하기를, “금계(金鷄)가 앞에 있고 옥견(玉犬)이 뒤에 있으니, 마치 명나라 양양(襄陽)의 금곡(金谷)과 같다.라고 칭찬했는데, 금계라는 곳이 닭우리고개라 한다.

용문면 선리(仙里)에 사는 서씨(徐氏)가 가난하여 짚신 장사를 하며, 그 아들을 가르쳐서 마침내 그 아들이 벼슬을 하여 고을 원으로 부임(赴任)하는 것을 보려고 하인에게 업혀서 예천읍 백전리 신거리에 가서 그 아들을 만나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정신없이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데, 이 고개에 이르니, 닭이 울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백방으로 도읍(都邑)을 정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지금의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 부근에 당도하게 되었다.

앞에는 내(川)가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어서 도읍지로 안성마춤이라 생각하고, 부하 장수에게 닭 한 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닭이 금당실에 닿을 때까지 울지 않으면 도읍으로 정하겠노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부하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그만 닭이 울고 말았다. 그래서 도읍의 후보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도 용문을 ”금당(金塘) 마질 반서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고개에서 옛날에 닭을 많이 키웠는데, 이 닭들이 요란하게 울 때면 용산리에 큰 횡재(橫災)가 났다. 그래서 용산리 주민들은 닭울이고개로 불러왔다고 한다.

조선 때 어느 선비가 가사(家事)는 돌보지 않고 공부만 하여 그의 아내가 품팔이를 하여 끼니를 이어가는데, 어느 날 아내가 품팔이를 나가면서 남편에게 이르기를, “여보, 이웃집 논매기하고 오겠어요. 마당에 나락을 널어놓았는데 날씨를 보니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소. 만약 소나기가 올 것 같으면 치워 주세요.”라고 하였다. 

아내가 나간지 몇 시간 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큰 소낙비로 변하여 갔다. 선비는 공부에 열중하다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어서 아내가 품팔이로 얻어 온 그 나락을 모두 물에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그 날 저녁에 돌아 온 아내는 빗물에 씻기어 간 나락을 보고 한숨과 더불어 화가 벌껏 났다. 

“아니! 여보, 당신은 공부만 하면 먹을 것이 생깁니까? 당장 저녁 끼니마져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헤어집시다. 나는 이 생활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부는 이혼(離婚)을 하고 말았다.

그 후 선비는 계속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돌아오던 중, 이 달부리고개에서 옛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옛 아내가 이르기를, “지난번에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하면서 다시 살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쏟아진 물을 다시 물동이에 담을 수 없소.”라고 하면서 그 선비는 떠나갔다.

아내는 옷을 찢어 나무에 걸어두고 돌을 던지면서 한없이 울기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가는 사람은 돌을 던지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어느 선비가 한양을 가기 위하여 밤길을 떠났는데,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날이 밝기 전에 이 고개를 필히 넘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선비가 고개를 넘기도 전에 닭이 울어서 선비는 어떤 한(恨)을 품고 죽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닭울이고개라 한다.

한편 예천읍 서본리 뒷산을 흑응산(黑鷹山)이라 한다. 이 산중턱에 넓이 10여 미터, 높이 4∼6미터의 넓은 바위를 일컬어 장군바위(將軍巖)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읍민(邑民)들은 이 장군바위가 매우 영검이 있다고 하여 예천읍(醴泉邑)의 수호신(守護神)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금기(禁忌)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관민(官民)의 대표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생돼지 머리를 위시하여 모든 제물(祭物)을 날것으로 장만하여 옛날 관복(官服)차림으로 정성들여 제사(祭祀)를 이 장군바위 앞에서 올리고 시장을 예천읍 앞에 있는 한천(漢川) 강바닥에서 보게 한다.
그리고는 시가지 요소엔 황토(黃土)를 뿌리고 여염집과 각 상점마다의 지붕과 출입문에 버드나무의 푸른 가지를 비스듬이 꽂아두면 사흘 안으로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장군바위 밑에 묘(墓)를 쓰면 날씨가 가물고 읍내에 있는 개들이 몹시 짖어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장군바위 앞엔 일체 묘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수 백년 동안 예천읍민들의 불문률(不文律)처럼 되어 있다.

때로는 욕심 많고 세력(勢力) 있는 사람들이 명당(明堂)이라는 장군바위 밑에 묘를 몰래 쓰고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평지처럼 그 위에 띠를 놓아도 개들이 짖어대고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읍민들에게 발각되어서 묘를 파헤쳐 버리기 때문에 묘를 못쓰게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예천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서 승리를 맹서(盟誓)하였으며, 189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때 예천군수가 여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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