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총각이 죽었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황진이는 16세기에 활동한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여류시인이다. 

그녀가 15살 되던 해에 한 동네에서 살던 총각이 짝사랑하던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대문 앞에 이르자 말뚝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총각이 죽은 사연을 알고 있던 한 친구가 황진이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그녀에게 전후 사정을 말하고 방금 상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크게 놀란 황진이가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 나가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었는데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또한 이 일이 그녀가 기생으로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비천한 첩의 딸로 온갖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는 기생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에게 이 자식은 죽고 없는 것으로 알아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되었다.

재색을 겸비한 황진이의 이름은 곧 팔도에 알려졌다. 그때 개성에는 철학자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과 '생불'로 자처하는 만석이라는 중이 있었다. 

황진이는 지조가 굳고 인품이 고려하다고 소문난 학자와 중의 의지를 시험해 보리라 생각하고 먼저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화담은 두말없이 쾌히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동안 다니다가 하루는 날이 저물었으니 선생이 거처하는 방에서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화담은 태연히 승낙했다. 그날 밤 황진이는 피곤한척하면서 팔을 그의 가슴위에 올려다 놓기도 하고 다리를 그의 배위에다 올려놓기도 하였다. 그럴때 마다 
화담은 "허, 몹시 피곤한 모양이로군." 하면서 팔과 다리를 조용히 들어 바로 놓아주곤 하였다. 그 후 여러 해를 황진이와 화담은 한 처소에서 지내면서 때로는 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였으나 화담은 끝내 스승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않았으며 황진이로 하여금 오직 글을 읽고 쓰는것에만 전념하도록 가르쳤을 뿐이었다.

화담 서경덕의 고결한 인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황진이는 그의 슬하를 떠나 이번에는 만석을 찾아갔다. 그는 천마산에서 10년 동안 도를 닦고 화담보다 자기 지식이 높다고 자랑하는 중이었다. 황진이 찾아가 도를 닦을 것을 청하자 만석은 눈을 감은 채 화를 내며 "지족선사는 원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단마디로 거절했다. 

며칠 후 청상과부모양으로 소복을 하고 절간으로 찾아간 그녀는 만석의 바로 곁방에 자리를 잡고 죽은 남편을 위해 백일불공을 한다고 하면서 매일 밤 남편의 명복을 비는 글을 지어 아름다운 목소리로 외웠다. 만석은 처음에 태연한척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황진이의 아름다운 자태를 엿보고서는 끝내 참지 못하여 불교의 계를 어기는데 이르렀다. 그때부터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든가, "만석중 놀리는듯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전해온다.

당시 개성 사람들은 용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으며 자랑하였다. 원래 양반계급이 절대화하고 있던 봉건적 유교 도덕의 속박을 싫어한 황진이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짙은 서정으로 섬세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노래한 시조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한 황진이 세상에 소문난 금강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의 명성을 듣고 있던 서울의 한 젊은이가 개성으로 놀러왔다. 그도 유람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진이는 같이 금강산 구경을 가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웃 나라 사람들도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원이라 하였거늘 우린 조선사람으로 제 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 본다면 어찌 수치가 아니겠소. 우연히 당신을 만나보니 길동무로 유람을 갈만하오." 젊은이도 반기며 선뜻 응해 나섰다.

황진이는 잡다한 행장을 다 버리고 굵은 삼베 치마저고리를 떨쳐입고 망태를 졌으며 혼에는 지팡이를 쥐었다. 같이 가는 젊은이 또한 무명옷에 삿갓을 쓰고 양식을 짊어졌다. 얼핏 보면 허물없는 오랍누이 동생 같은 그들의 차림새에도 까다로운 남녀간의 예의범절을 벗어나 금강산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려는 황진이의 섬세한 심정이 담겨있었다.

유람길에 나선 그들은 수백리 먼 길을 걸어 금강산에 이르렀다. 그는 노독오른 다리를 끌고 민가나 절간들에서 밥을 빌어먹으면서도 금강산의 명소를 다 돌아보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그는 내친 걸음에 태백산을 거쳐 우리나라의 5대 명산의 하나인 지리산까지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라도 나주에 이르렀다. 마침 그곳에서는 나주목사가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주는 물론 부근의 명창들까지 구름같이 모여들어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집이 떠나갈듯 하였다.

황진이는 말도 없이 잔치판에 슬며시 끼어들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간드러지게 불렀다. 때 아닌 고운 목소리에 명창들은 입을 다물었고 목사이하 좌중은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행색으로 보아 미친년이 분명한데 어데서 저런 노래소리가 나오는가 의문되어 모두들 놀라는 가운데 황진이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목사가 통인을 불러 그녀의 신분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녀가 다름 아닌 팔도에 이름난 송도의 명기 황진이임을 알게 된 목사는 그녀를 가까이 불러올리고 잔치의 귀빈으로 모셨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금강산 유람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자기 생애에 많은 일화를 남긴 여류시인 황진이는 마흔 살을 전후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금강산 구경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후세에 전해오고 있지만 다만 금강산을 노래한 황진이의 시가 없음이 유감일 따름이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