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산' 지리산은 민중에게 혁명의 꿈을 심어준 장소

지리산 기슭 산골마을에서 평민영웅 아기 장수 우투리가 탯줄을 억새로 끊으며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리산과 바다를 오가는 비밀스러운 자기수련과정을 거쳐 군사와 식량을 모아 세상을 평정할 꿈과 힘을 키우던 중 결국 자기와 가장 가까운 어머니의 고발로 인해 좌절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우투리'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지리산은 단지 패배자와 은둔자들만의 보금자리, 자양분을 안겨다주는 그런 모성적 의미의 산으로서만 기능하는 곳이 아닌, 새로운 변혁의 꿈과 그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하는 능동적인 공간임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전설인 것이다.

걸어나오는 산 이야기는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얽힌 전설로서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어느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고정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나왔다는 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서 자생력을 회복한 저항과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오던, 나아가 들판문화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산은 들을 향해 '열린 공간'이자 또한 들보다 높고 험해서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들판문화가 강고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산은 그 압력을 자연히 받게 되지만 역으로 들판문화가 느슨해져 산 자체의 동질성과 자생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면 산은 들판문화에 저항하고 나아가 크게 위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서의 모습과 부성적인 산으로서의 모습 양면을 띠는데, 이것을 흔히 '지리산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고 박현채 교수는 '수동성'과 '능동성'이란 말로 정리한 바 있다. 분명 지리산은 정치사회적인 과도기나 이행기에서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을 벗고 능동적으로 역사 전면에 나서곤 했다. 또 그러한 역할은 근대로 올라올수록 더욱 큰 비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옛날 피아골의 깊은 골짜기에는 종녀(種女)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해온다.

종녀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집에 팔려가서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자기 생업으로 하는 소위 '씨받이 여자'를 말한다. 피아골에 있었다는 종녀촌에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성신(性神)어머니를 비롯하여 그 밑에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이 절대순종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가능했던 이 기이한 풍습 때문에 때때로 종려들은 갖은 수모와 학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집에 팔려 들어가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타의에 의해서 혈육의 정을 끊고 되돌아서야만 했고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그 딸을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종녀로 길러 불행한 운명의 길을 대물림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종녀들의 피눈물 어린 통한의 인생살이와는 달리 많은 종녀들을 거느린 성신어머니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향락을 즐겼는데 자주 성신굴에 찾아가 성신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렸단다.

은촛대에는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성신상과 남근(男根)이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어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 던지면서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관능적인 춤을 추다가 흥분의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어울려 한바탕 욕정을 불태우곤 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피아골 종녀촌의 애절한 전설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우리 중,근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후 하늘나라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그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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