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암과 허왕후의 이야기는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관계있는 흥미로운 것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렸으나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성불한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영지(影池)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곳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현재는 범왕리(凡王里)로 변해 있다.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쌍계사 아래 편에 대비리(大比里)로 변해 있다.
             
한편 불일폭포는 하동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풍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천길 낭떠러지에 흐르는 비류가 직하하여 소를 만들었는데 그 소를 용소라 부른다. 

아득한 옛날 불일폭포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불일폭포가 있던 골짜기 물이 곱게 흘러내리던 용소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용소 옆에는 불일암이란 암자가 있어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뇌성이 치고 벼락이 나무를 때리며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 쳤다. 

산이 쩍 갈라지고, 용소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푸른 빛을 발하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쿵쾅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비가 마구 쏟아졌다. 이윽고 비가 멎고 뇌성도 잠잠해지자 불일암 스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용소 옆에 하나로 서 있던 산은 두 개로 갈라졌고, 곱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없어지고 천애 절벽이 생겨 물이 폭포가 되어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이 절벽을 내려가 보니 절벽 밑으로는 새로 물길이 나 있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는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님은 이는 분명 부처님의 자비가 내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쌀을 암자로 옮겼다. 

그 다음날 스님은 다시 그 절벽의 뚫어진 구멍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에서는 또 쌀이 나와 있었다. 구멍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쌀이 나오게 되자 스님은 이 쌀을 화개장터에 내다 팔기로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 후부터 하루는 쌀을 구멍에서 옮기고 다음날은 그 쌀을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의 쌀을 사는 아주머니가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쌀을 이렇게 조금씩 가져올 것이 아니라 며칠 모아서 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시면 수고도 덜고 또 목돈도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암자로 돌아와 밤새 곰곰이 생각하던 스님은 생각이 여기에 까지 미쳤다. "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넓게 뚫는다면 반드시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고, 그럼 장터 아낙의 말대로 큰 부자가 될 수있을것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스님은 구멍을 더 크게 뚫을 도구를 챙겨서 폭포로 내려 갔다. 그리는 열심히 구멍을 뚫어 전보다 세배나 더 넓게 뚫었다. 구멍을 뚫은 스님은 내일부터는 세배의 쌀이 나올 터이니 마음이 흡족했다. 

그리고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밤잠을 설치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우다시피 했다. 

날이 밝자, 스님은 큰 자루를 메고 절벽으로 내려가서는 곧 바로 크게 뚫어 놓은 구멍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곳엔 세 배로 많은 쌀이 나와있기는 커녕 단 한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이 욕심이 그만 쌀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사람들은 그 쌀이 나오던 바위를 용추 쌀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화엄사 경내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각황전이 서있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丈六殿)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년에(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숙종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각황전이 건립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다음 설화에 그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벽암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중창불사를 시작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지원을 받아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밤새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계파스님은 다음날 아무도 몰래 절을 나섰다. 한참 길을 가다 보니 간혹 절에 와서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파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간밤에 받은 계시를 지워 버릴 수 없어 그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의 시주를 청했다. 어이가 없기는 노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하루종일 간청하는 스님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큰 발원을 하였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를 내리소서"라는 말을 마친 노파는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스님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멀리 도망쳤다. 몇 년 뒤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나타난 계파스님은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스님을 보자마자 반가워 하며 매달렸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를 않았는데, 계파스님이 안고서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쫙 펴졌다. 그리고 그 손 안에 '장륙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륙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절 밥을 얻어먹는 하찮은 거지라도 청정한 공덕을 쌓아 장륙전 중창에 힘이 되었다는 감동을 주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 공주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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