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헌이 섰던 곳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깨진 기왓장 만 있을뿐

증평에서 동북쪽으로 1.5㎞ 떨어진 마을이 증평읍 미암리 마을이다

옛날의 군소재지이고 미암리에는 동헌과 시장이 있고 지금의 삼거리를 금부라했으며 미암리 2구의 시화 부락엔 각처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의 말 때문에 역마촌을 이루는 등 어느 고장마다 살기 좋고 인심이 좋았다.

어느 해인가 신임 사또가 이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부임해 오면서부터 이 고장에는 통탄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기게 되었다. 신임사또의 부인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부부간의 금실이 너무나 좋아서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식이 없어 항상 근심 하던차 부처당골에 있는 절을 찾아가 신임사또 부인은 자식을 얻기 위하여 매일 같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며 자식 갖기를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여인의 방임이 머리를 들었다고 할까? 아니면 자식을 보겠다는 한결같은 마음 때문인지 속세를 등진 중생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고 한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처럼 사또 부인의 좋지 못한 행동이 길어지자 사또가 알게 되고 말았다.

사또는 남자와 사또 부인의 잘못을 무거운 죄로 다스려 온 고을 백성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이고 충청감사에게 진언하여 동헌을 지금의 괴산군 청안면으로 옮겨가므로 이 고을은 점차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살기 좋고 인심 좋던 고장이 갑자기 폭풍우가 지나간것처럼 망하였다하여 이 고을 일부 동리를 망골이라 전하고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 자리인 현재 삼거리를 옥고개라고 하였다.

동헌이 섰던 자리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왓장 깨어진 것만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한편 밤티골은 증평에서 남동쪽으로 12㎞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협이 험한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조그마한 마을로 이 마을 주민들은 옛날에는 이 곳에 고을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고을터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주민들 사이에 이곳에 고을이 있었다는 얘기가 구전되고 있다.

현재 이 고장의 골짜기마다에는 특징적인 이름이 있는데 예를 들면 향교골, 사장터, 빙고재, 독자마골, 절골, 담안, 釜店 등이 있는데 그 위치가 학교를 중심으로 사방 2㎞내에 위치하고 있다.

우선 향교골을 보면 옛 날에 이곳에 향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율리초등학교의 위치를 정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없다. 다음으로 사장터는 선비들이 활을 쏘던 장소로 현재 이곳 산마루에 500평정도의 평지가 있다. 빙고재는 옛날에 이 곳에 얼음을 저장했었다고 한다. 

또 절골이라는 곳은 예전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고 기와를 구워냈다고 하는데 현재 절터가 남아 있으며 주민 박주섭씨 소유 밭에는 기와를 구웠던 가마가 묻혀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변 어디를 파보아도 많은 기와가 여기저기서 출토되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수십장의 기와가 쌓여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독가마골이라는 곳이 있으나 이 곳에서는 독을 구웠던 근거를 볼 수 없다. 또 담안이란 곳이 있는데 원님이 머물던 곳으로 그 주위에서 많은 기와가 출토되고 있으며 현재 화강암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부점은 숯을 굽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또 좌구산에서는 금광석이 출토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먼 옛날에 틀림없이 이 곳에 고을이 있었으리라 전해지고 있다.
 
또 증평읍 시가지에서 서북쪽으로 2㎞ 쯤 떨어진 미암1리 미륵댕이 마을에는 미륵사라는 전통사찰옆에 관음보살입상 한구가 서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에 인근 부락민 전체가 질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여 매일 2,3명씩 사망하는데 부락민 세명에게 비몽사몽간에 도승이 나타나 불교를 믿고 미륵사에 있는 관음 불상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7일이내에 효험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믿지 않다가 매일 질병이 심하여가니 하는 수 없이 부락민이 합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한지 7일 만에 부락민 모두가 쾌차하였다.

그 후부터 마을에서는 연중 일회 씩 합동기도를 올렸다하며 지금도 미암리 주민들은 매년 합동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려 소원성취를 빈다고 한다.

증평읍 남차리에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긴 하천이 흘렀으니 장천(長川)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장래에 해마다 홍수가 밀어닥쳐 전답의 해가 많아 수살고사를 올려 이를 막기에 이르렀으며 이 고사는 매년 정월 14일에 지냈는데 이 제사에 참석할 사람은 3일전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날마다 수살막에서 냉수로 목욕을 하여 정성을 다하고 제물을 정성껏 차려야 만이 그해에 홍수의 피해를 막고 동리에 질병이 없이 평안하다고 믿었다.

본래 수살은 숫수살과 암수살이 따로 있어 고사를 따로 지냈는데 병술년(1946년) 큰 장마에 장래 위쪽 500m 지점에 있던 숫수살이 떠내려와 암수살이 함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정월 열나흘 날에는 큰 돼지를 잡아 고사를 올리고 있으며 고사 후에는 주민 모두가 모여 음복하며 1년내 수난이 없기를 기원하고 있다 한다.
 
갑자기 폭풍우가 지나간것처럼 망하였다하여 이 고을 일부 동리를 망골이라 전하고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 자리인 현재 삼거리를 옥고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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