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을 평정한 결정적 계기는 무악재의 역풍

이괄은 야망이 있는 무인으로 광해군 15년(1623)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즉위시킨 인조반정에 가담한 것은 이귀와 김유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북병사로 부임하기 직전 반정계획에 가담, 한 때 반군의 대장에 추대되는 등 수훈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반정 직전부터 김유와 갈등이 있었고, 또한 반정 성공 후의 논공행상에서 반정계획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공신에 책정된 데다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자 불만이 많았다.

곧 이어 관서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그를 도원수 장만의 휘하로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키자 불만은 더욱 커져 인조 2년(1624) 1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반란 음모를 미리 알고 한성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휘하 장수인 기익헌·이수백과 구성부사 한명련 등과 함께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켜 1만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한성으로 치달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대응하는 한편 반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한성에 있던 이괄의 동생 이돈 등 49명을 처형하였다.

반군은 황주·평산 등지에서 뒤쫓아온 도원수 장만의 관군과 저탄에서는 정부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합세한 군단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 반군이 개성·벽제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오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길을 떠났으며, 한성은 반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영변에서부터 한성에 이르기까지 관군의 강한 반격이나 저지가 예상되면 사잇길을 택하였고, 그 행군 속도가 대단히 빨라 관군의 혼란을 가져 왔다.

영변을 출발한지 20일이 못되어 반군의 선봉기병 30명은 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성 안은 이미 그 전날 인조와 조신들이 공주로 떠난 뒤였으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하였다. 

이괄은 경복궁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선조의 10째 아들 흥안군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러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무악에 진을 쳤다. 

관군이 무악에 진을 치게된 것은 방어사 정충신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을 점거하여 진을 치면 도성을 내려다 보게 되니 적이 덤비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적은 쳐다 보고 공격해야 하고 우리는 높은 지점에서 싸우게 되니 틀림없이 적을 부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관군은 무악에 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군사 이동을 밤에 하였는데, 이날 밤 동풍이 어찌나 심하게 불었던지 밤새 이동하면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는데도 성안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고, 다음 날에야 관군이 무악을 점거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이 때도 정충신의 지략이 큰 공헌을 하였다. 즉, 먼저 무악의 봉수대를 점령한 다음 속임수로 저녁 일찍 후방에 아무 일이 없다는 신호로 봉화를 한번만 올리게 하여 반군으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한편 관군의 진영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게 하였던 것이다.

관군이 무악을 점령한 사실을 다음 날 2월 11일 아침에야 알게 된 이괄은 관군의 세력이 작은 것을 깔보고 도성 내 관민들에게 포고하기를, “장만의 군대 쯤은 단숨에 무찔러 보이겠노라.” “싸움을 구경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성 위에 올라 구경하라.”고 큰소리 치며 지금의 적십자병원(옛 경기감영터) 근방에서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한 대는 애오개(아현)를 지나 대현 쪽에서 진격하게 하고 다른 한 대는 경기중군영(현 동명여자고등학교 자리) 부근에서 무악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양편 군대는 무악산정에 가까운 험준한 비탈에서 싸우게 되었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는데, 처음부터 동풍이 세차게 휘몰아쳐 반군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바람을 타고 급공격을 할 수 있었다. 관군은 죽기로 싸웠으나 수십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과 탄알이 비오듯 하였으며 반군에게 유리한 가운데 전투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동풍에서 서북풍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무악정상을 쳐다보고 공격하던 반군은 바람머리에 위치하게 됨에 따라 휘날리는 먼지와 모래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에 관군은 용기를 얻어 공격을 가하니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날 묘시(오전 6시 30분∼7시 30분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4시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전투는 관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패한 반군은 달아나 민가에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또한 도성민들이 돈의문과 서소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반군들은 곧바로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서 숭례문을 통하여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이괄은 남은 수백기와 함께 광희문을 빠져 나와 탈출하였고 다음 날 2월 12일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목사 임회를 살해하고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괄은 이곳에서 그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게 아들·아우와 함께 살해되었다. 공주로 피난 갔던 인조는 2월 19일 공주를 떠나 2월 22일 한성에 돌아 왔다.

왕도에까지 침입하여 국왕이 남쪽으로 피난 가는 사태에 이른 조선왕조 초유의 반란사건이었다.

무악재는 또한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북으로 피난가면서 넘었던,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고개이기도 하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해 오자, 조정에서는 4월 29일 어전회의를 열고 평양으로 피난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튿날 4월 30일 비 내리는 새벽 돈의문(서대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었다. 이 때 어가행렬은 선조와 세자, 그리고 왕자·비빈과 함께 이항복·이산해·유성룡 등 100여명에 불과한 신하들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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