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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기획] 조선, 임진왜란후 10여 년만에 일본과 교류서로 원수로만 지내기엔 주변 국제 정세가 급변
  • 이두 기자
  • 승인 2017.11.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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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겪은 조선과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원수로만 남아있기에는 주변 정세가 매우 급박했다. 조선은 전후 복구 뿐 아니라 북쪽에서 세력이 커지는 여진족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바뀐 일본은 정권 안정 외에 조선과 명의 보복을 의식해야 했다.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인 대마도는 굶어죽게 생겼다. 조선과 무역이 단절되고 일본으로부터 대접을 못받자 위기에 놓인다. 서둘러 대마도가 또 다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대마도는 조선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설명하며 일본에 붙잡혀간 조선인 160명을 보내온다. 이후 여러 차례 조선인을 송환하며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1604년 조선은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탐적사(探賊使)를 보낸다. 적의 동태를 정탐한다는 의미다. 1605년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조선인 3000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5만에서 2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은 화해의 세 가지 조건을 내건다. 첫째, 화해를 청하는 일본 장군(호칭은 일본 국왕)의 국서를 보낼 것, 둘째 임진왜란 당시 도굴된 왕릉인 선정능의 도굴범을 잡아 조선으로 보낼 것, 셋째 죄없이 잡혀간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낼 것이다.

위의 세 조건이 쉽게 받아들여져(일부 거짓으로 드러남)조선은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1607년 통신사절단이 아닌 ‘회답겸쇄환사’(일본의 화해요청에 답을 주고 조선인들을 데려 온다는 의미가 담김)로 이름붙여진 406명이 일본으로 간다. 사절단은 5개월간 일본에서 활동한 뒤 1400여명의 조선인과 함께 귀국한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10여 년이 지난 1609년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맺어 단절된 교린관계를 회복한다. 이후 조선은 세 차례 쇄환사를 일본으로 보내 조선인 9000여명을 고국으로 데려온다.

병자호란이 나던 1636년 조선은 통신사를 부활시켜 일본에 파견한다. 1627년 정묘호란을 겪고 또 청의 위협에 있던 조선은 당초 일본의 사신 파견을 반대하는 입장이 강했다. 그러나 최명길이 “일본과 우호를 고려한다면 상대의 변화에 즉시 대응해야 하고, 국서 개작 사건에 대해서는 조선은 전통적 우호관계인 대마도주를 옹호해야 하고, 대마도와의 관계는 조선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다”며 사절단 파견을 적극 주장했다. 결국 사절단의 명칭이 ‘통신사’로 정해졌으며 이후 1811년까지 9차례 통신사가 파견된다.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 쇄환사까지 포함하면 모두 12차례다. 통신사는 대부분 에도 막부 장군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통신사가 파견된 1800년대 중반까지 조선과 일본은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통신사는 부산을 거쳐 대마도와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나고야 오이소를 거쳐 목적지인 에도에 도착했다. 일본 전역을 거의 거치는 셈이다.

임진왜란 후 200년 평화는 1800년대 들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1811년 조선은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마지막 통신사였다. 통신사 일행은 종전과 달리 일본 에도까지 가지 못하고 대마도까지만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막부 장군이 파견한 막부 관리와 국서를 교환했다. 그 동안 행해졌던 화려한 접대나 학술 및 문화 교류도 이뤄지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의 긴밀했던 관계가 틈이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지막 통신사행이었다.

1700년대 후반들어 일본은 통신사의 파견 연기를 조선에 요청했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신사 영접에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데 당시 막부와 각 영주들의 재정이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해왔던 조선과의 교류가 필요없어졌고 한편으로 조선 멸시관이 고개를 들었다. 조선 멸시관이란 조선은 일본을 두려워하는 소국이며 별 볼 일없는 나라인데 온 힘을 기울여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일본인 일부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 멸시관은 점차 정한론(征韓論)으로 탈바꿈하면서 조선 침략을 위한 구실이 된다.

1800년대 들어서는 서구 세력이 동아시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동아시아만의 전통 외교보다 서구 세력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되었다.

임란 이후 조선통신사 12차례…일본에 한류 바람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는 모두 12차례 파견됐다. 세 차례는 일본에 붙잡혀간 조선인을 데려온다는 쇄환사였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포로 데리고 오기, 일본 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직 계승 축하가 주임무였다.

통신사 행렬은 무려 4~5㎞가 될 정도로 장관이었다. 일본의 일반 평민들은 몇십 년만에 행해지는 통신사 행렬이 대단한 볼거리였다. 조선통신사를 수행하거나 짐을 나르는 짐꾼 등 3000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갈 때면 모두 거리에 나와 이들을 반기고 신기해했다. 통신사가 통과하는 각 번에서는 도로나 다리의 정비 및 개축, 조경 등이 이뤄졌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통신사 일행에는 그림을 담당하는 화원과 글씨를 담당하는 사자관(寫字官)이 반드시 포함됐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의 서화에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에 파견돼 그림과 글씨를 제작해 줬다. 1636년과 1648년 유일하게 일본에 파견된 화가인 김명국(1600~?)을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했다. 그려달라는 일본인들이 너무 많아 밤잠을 자지도 못하고 그렸다고 한다.

일본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데도 왜 조선통신사를 유지했을 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도쿠가와 막부는 집권 초기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국제 관계를 통해 과시하려 했다. 일본 국민들에게 조선통신사를 단순한 축하사절이 아닌 복속사절로 인식시켰다. 조선도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 정국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문화 교류에는 더할나위 없이 큰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는 조선통신사 파견 재현 행사가 매년 행해지고 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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