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땅에 꽂혀 뿌리를 내려 느티나무로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곰메(706m)는 서진해 쪽에서 보면 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솟은 산이다.

조선 고종 11년 명성황후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해 놓고 전국의 명산대천마다 무당을 보내어 그의 장수 다복을 비는 치성을 드렸는데 곰메에서도 백일치성을 드렸다고 전한다.

이 곰메의 서쪽 기슭에는 하구와 냉천 마을, 서남쪽에 자은 본동이 있고, 동남쪽 기슭에 백일 마을이 있다.
곰메 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신비스럽게 솟아 있어서 imagefont메바위(熊山巖)'사투리로 곰실방구'라 하며 또 이 바위가 시루 같다 하여 시루 바위라 하고 산을 ‘시루봉’이라고도 불렀다.

일본인들은 전설을 만들어 산 이름을 ‘히메이와’(아름다운 여인 바위라는 뜻)라고도 불렀다. 이 바위에 올라 멀리 동쪽을 바라보면 대마도가 보이니 무엇이거나 일본과 관련시켜 이름을 지어 부르려고 한 그들이었던지라 여기에도 그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 전설 내용은 조선 시대 왜국에 제포를 개항하였을 때 대마도의 사신을 따라 제포를 내왕하던 한 역관과 웅천 기생 아천자(阿天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역관이 대마도로 돌아가고 없을 때에는 곰바위에 올라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고 역관을 그리워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정이 두터워졌건만 삼포왜란으로 왜국과 국교 단절을 하고 또 신축난동으로 왜관을 부산포로 옮긴 뒤로 역관은 제포로 다시 올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아천자는 변함없이 곰바위에 올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오지 않는 그 역관을 기다리다 마침내 몸져눕고 그 길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일본인들은 이 곰메 바위를 ‘히메이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편 안민부락에서 장복산을 넘어 진해 경화동으로 넘어 가는 정상부가 만날재다.
 
과거 창원사람들과 진해 및 웅천 사람들간에는 혼사를 많이 맺었는데, 진해쪽으로 출가한 여인들이 창원쪽으로 오고 싶어하고 그곳에서 창원으로 시집온 여인들이 진해로 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음력 8월 중추절에 첫날은 제사를 모시고 이튿날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므로 부인들의 외출이 부자유스러웠으나, 삼일째 되는 날은 외출이 허가되어 양쪽 부인네들이 서로 자기 고향쪽을 바라보기 위해 이 산정에 올라오게 되니, 자기 친정사람과 일가 친척들을 만나게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이 날이 되면 고개 정상에서 서로의 소식을 묻게 되고 친정어머니도 만나게 되어 많은 여인들이 서로의 회포를 풀며 놀이를 하였다고 하여 만날재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또 조갈내는 의안동에서 상북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개천으로 약 200년 전 사화동 박씨 문중에 우곡(寓谷)선생이라는 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적 한번은 서당에서 회식을 하는데 고깃국이 나오자 그는 수저도 안 들고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가 병석에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차마 먹지 못함을 짐작한 훈장은 회식 후 그에게 고깃국을 따로 한 그릇 주었다. 우곡이 기뻐하며 집으로 가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 물이 불어 시내를 건널 수 없었다. 이에 탄식하고 있을 때 비가 개고 금방 물이 말라서 무사히 건널 수 있었으므로 그 뒤부터 이 내를 조갈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지귀동에 있는 부자상호비는 조선 순종 때에 세워진 효자비로 역시 효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우진(金禹振)이 소시 적에 어머니와 사별한 후 생전에 고기반찬을 못해드린 것을 한탄하여 평생 고기를 먹지 않자 그 집의 개까지도 고기 뼈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다.

그의 아들 창용(昌瑢)도 이에 못지않은 효자였는데 그가 연로하여 목병으로 앓고 있을 때, 뱀알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창용이 겨울산을 백방으로 돌아다니다 잠시 쉬는 사이 까치가 요란하게 울기에 가보니 뱀알이 있었다 한다.

또한 우진이 죽은 뒤 이장을 하려고 밤중에 작업을 할 때, 불빛(鬼火)이 나타나 일대를 비춰주다가 일이 끝나자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목하니는 옛날 이 곳에 살던 고아였는데, 가난하고 보잘것없었으나 마음씨가 착하고 책임감이 강하였다. 하루는 화주승이 그를 보고는 절로 데려갔는데 절에서도 동료스님의 일까지 도맡아하여 불목하니라 불리게 되었고 주지스님은 그를 총애하여 부처님의 제자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절에 일하는 처녀가 들어오게 되었다. 불목하니와 처녀는 일을 같이 하는 사이에 애정이 싹트게 되었으나 젊은 스님들이 시기하자 주지는 처녀를 돌려보냈다. 

이를 뒤늦게 안 불목하니는 한밤중에 처녀를 찾으려고 사방을 헤매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때 그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꽂혀 뿌리를 내려 자란 것이 지금의 퇴촌마을 느티나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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