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어가 다섯 색깔의 구름을 타고 내려와 금샘에서 놀다가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 옆에는 바위로 된 샘 하나 가 있다.

'동국여지승람''동래부지' 등의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 3장가량이고 물이 늘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금빛이 있으므로 금색어가 다섯 색깔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다고 전해 지고 있다.
 
금빛 물고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논다는 금샘이 있는 금정산 최고봉우리인 고당봉에는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 죽은 한 화주보살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신라시대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목조건물인데다가 잦은 화재에 시달렸다. 그 첫 번째로 임진왜란을 만나 모든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들은 울산지방에 상륙한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다 신라 이래 면면히 내려오던 화엄 10대 사찰인 범어사의 웅장한 기운을 그대로 둘 리가 만무했다. 특히 대마도를 향해 선 고당봉 아래 왜군들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닌 범어사는 왜군들의 방화에 불타버렸다.

이 때 밀양에 살던 화주보살은 범어사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절을 잃고 망연자실한 스님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시주를 받은 할머니는 스님들의 음식을 만들고 수발을 들면서 불가에 귀의하였다. 

"내가 죽기 전에 우람했던 범어사가 다시 제모습을 찾을 수만 있다면. . ."화주보살은 몸을 아끼지 않고 범어사 중건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주를 해오는가 하면 절의 살림도 도맡아 꾸려나갔다.

"가난한 집에는 제사도 많다든가!" 빈궁하기만 한 절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던 화주보살은 어느날 주지 스님께 조용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봉우리 아래에 고모선신(姑母善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금정산의 수호신으로 변해 범어사를 도우겠습니다."

평생을 범어사 재건을 위해 몸바쳐 살던 화주보살은 죽어서도 범어사를 보호하기를 소원했다. 

스님은 화주보살의 고귀한 뜻을 살려 그의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지어 1년에 두 번씩 (음력 1월 15일, 5월 5일) 고당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 화주보살의 유언처럼 범어사는 다시 중건하게 되었고 화엄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잡았다. 이 때부터 이름을 얻지 못하던 금정산 제일봉은 화주보살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할미고에 집당을 사용해 고당봉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당봉의 화주보살 사당은 고당약수터에서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로 가다 보면 왼쪽편 가파른 절벽사이에 초라하게 서 있다.
그 후 사당이 고당봉의 전경을 망치고 무녀들이 많이 드나들어 촛불로 인한 화재위험이 있다고 하여 헐었으나 그 때마다 범어사에 흉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얼기설기 엮어져 있는 고당봉 바위틈 사당에 얽힌 이야기는 '범어사 서기궤유전'의 '산령축'에 나온다.
 
또 금정산성의 전설을 말하자면,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는 두 성문을 보다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두루 수소문하여 찾아냈는데 결국은 사제지간인 두 석공에게 두 성문의 재건을 의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선생에게, 서문은 제자에게 맡겨 서로 경쟁을 시켰다고 한다. 서문을 만드는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렸으나, 동문을 담당한 선생은 원래 야욕이 많은 사람이라 욕심을 내어 웅대하게만 세우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두 성문은 사제의 이러한 특성이 담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자가 먼저 서문을 완공한 뒤 동문의 스승을 찾아가 보았으나 스승은 아직 성문도 달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동문은 서문에 비해 규모는 웅대하지만 견고하지 못해 결국 제자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한때는 살해할 음모까지 꾸민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의 공사가 끝난 뒤에는 서로 힘을 합쳐 밀양의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과 서문은 물론 그 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도 동문과 서문의 차이가 사제지간이었던 두 석공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문은 금정산성 4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예술적인 감각이 가장 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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