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誠하나로 목숨을 바친 우직하고 용맹무쌍한 '장수'

1619년 봄 남의 나라 전쟁인데 출정 시 맹세한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하나로 목숨을 바친 우직하고 용맹무쌍한 장수가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말의 비석은 바로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위치한 의마총(義馬塚)이다.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1576-1619)은 해남군 삼산면 충리에서 거주하며 무예를 닦고 평안도(平安道) 영유(永柔) 현령으로 있을 때 명(明)나라의 파병 요청이 있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하고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병하였다.

함길직도(直搗)의 적 소굴을 소탕하던 중 패하여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을 하였으나 이유길만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분전하던 중 화살을 맞고 죽음에 이르렀다. 

충리에 있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 장수, 이유길의 유허비(해남군 향토유적 제1호) 앞에서 군인의 생명인 '충의 정신'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생각한다. 

만주에서 부상한 여진족 누르하치는 후금 국을 일으키고 명나라의 세력을 꺾기 위해 계속 명을 압박해 나갔다. 이에 명은 후금토벌을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한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입었기 때문에 姜弘立을 5도 도원수로 하고 金京瑞를 부원수로 병사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이유길은 金應河· 李一元· 李繼宗 등과 함께 원명군의 우영중군장으로 참여한다. 

1618년 10월 평북 창성에서 명의 10만 대군과 합류, 승리와 패배가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나, 1619년 봄에 들어 점차 후금군 숫자가 많아지자 원정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 

명나라 군사는 다 죽고, 조선군사도 더 지탱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도원수(강홍립)와 부원수(김경서)는 후금 군에게 항복하였지만 좌영장 김응하와 우영장 충의공은 최종까지 싸워서온 몸에 상처를 입고 손가락이 잘려서 더 이상 활을 쏠 수도 없었다. 
김응하 장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화살한발 쏠 수 없이 망가진 손가락을 보면서, 이유길은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입고 있던 한삼소매를 찢어서 '三月 四日 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자신이 타던 말의 갈기에 매어 주고 채찍을 쳐 보냈다. 
말을 떠나보내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보니, 예하 3000의 병력은 거의 없어지고 군관 60여 명과 사병 몇 명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다 포탄은 남은 것이 없었고, 화살·창·칼 등도 모두 소진되거나 부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이국 만 리 후차령이라는 곳에서 62명의 군관과 사병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이유길 장수의 기록이다. 
         
한편 '三月 四日 死'란 피 묻은 한삼자락을 갈기에 맨 이유길 장수의 말은 진중을 뛰쳐나와 주인의 뜻을 알았음인지 산과 강을 건너 3일 동안을 달려 주인이 집에 도착했고 구슬피 울다 숨을 거두었다.

이후 광해군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과 의마총은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에 위치하는데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으나 이유길 장군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어 가묘로 조성돼있다.

시체가 없는 무덤 곧 '혈삼무덤'의 주인공이 이유길 장수이며 그 충성스런 말도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말 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義馬塚'이라는 묘지석까지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

사당 옆에는 연안이씨의 종손 이봉길씨가 살고 있어 설명과 함께 묘역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넓은 공터 옆에 신도비가 있고 왼편으론 이유길 장군의 불천위(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하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보관하도록 왕이 허락한 신위)가 모셔진 부조묘(불천위를 모신 사당), 청련사가 있다. 이유길 장군의 활약과 교지 등이 담긴 ‘연안이씨 이유길 가전고문서’는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으며 후손 이호룡 가에 소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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