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으로 쌍수산성에 피신한 인조왕에 쌀과 닭을 바쳐

옛날 우성면 동곡리에 조왕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인근 목천리에는 소우물, 우정 또는 우천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곳은 인조 임금의 피난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성면은 본래 우정면이었던 곳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 으로 피난하여 공주의 쌍수산성으로 들어갔다.
임금의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 인조가 타고 가던 소가 몹시 기갈이 심하여 헉헉거리므로 이 우물에서 물을 먹였다. 

그때부터 이 우물을 '소우물'이라 하여 유명해지게 되었고, 면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쌍수산성에 피신한 인조 일행은 식량이 떨어져 몹시 곤란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에 사는 관류당  노숙이 쌀 300석과 닭 수백 마리를 바쳐 급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노숙에게 소원을 물으니 "묵정밭의 세금을 덜어 민폐를 적게하여 주소서"하고 아뢰니 "너는 왕을 돕고 농민을 위하는 사람이구나"고 칭찬하고 친히 마을 이름을 조왕동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역대의 많은 임금 중에서 인조만큼 여러 땅이름에 숱한 일화를 남긴 왕도 드물 것이다

 또 이곳에 살던 한 사내가 하루는 인근에 있는 연미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고 배가 고파서 바위 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났다. 사내는 처녀와 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 굴을 나갔다가 음식을 가져오는 처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뒤를 쫓아가 보니 처녀가 곰으로 변하여 사슴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후 처녀는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을 알고 사내를 바위 굴 속에 가두어 놓았으며 사내는 암콤과 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았다.

어느 날 암콤이 바위로 굴을 막지 않고 나간 틈에 사내는 도망을 나와 금강을 헤엄쳐 건넜다. 뒤늦게 이를 알고 쫓아 나온 암콤이 멀리서 자식을 들어 보이며 마음을 돌리도록 호소하였지만 이 사내는 매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암콤은 어린 자식들을 안고 금강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후부터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일이 많아 나루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곰내.웅진 또는 곰나루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1972년 이 나루에서 돌로 새긴 곰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곰사당인 웅신당을 지어 모시고 있다.

고려 초부터 부르기 시작한 공주라는 이름은 공주의 진산인 공산이 '공(公)'의 글자와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곰주'가 음이 비슷한 '공주'로 바뀐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금강가에 용왕제를 지내는 용제당을 둔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웅진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소정(小亭)이라 하고, 그 앞들을 '소 정이 벌'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 하며, 이 벌판에 지금도 ' 웅진도독부터' 또는 '소정방장대 터' 등의 욕된 발자국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또 어느날 허씨라는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노루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쫓겨 나무더미 속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뒤쫓아 온 사냥꾼이 부상당한 노루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묻자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어 사냥꾼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사냥꾼이 가버리자 노루가 나무더미 속에서 나와 나무꾼에게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그를 한곳으 로 데리고 가서는 앞발로 땅을 파헤치면서 무덤을 만들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나뭇꾼은 "옳지 이곳에 묘를 쓰라는가 보다" 생각하고서 돌아가신지 얼마되지 않은 부친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다. 그후 나무꾼의 집안은 점점 번성하여 잘살게 되었다고 하며 그뒤부터 이곳을 '노루목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계룡면 기산리와 월곡리 사이에 늘티, 또는 판티라고도 부르는 무너미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공주시에서 전라북도로 통하는 큰 고개인데 계룡산 국립공원 뒤에 있으며 해발 약 50m의 나지막한 고개이다. 전해오기를 계룡산에 도읍이 들어서면 금강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논산 노성면의 초포를 지나 노산천 과 합하여 강경포로 들어가서 초포에 배가 다니게 된다고 하며, 정감록에는 "무너미 고개로 물이 넘어 가면 신도내(논산시 두마면)에 나라의 도읍이 옮겨온다"고 전해진다.
 
1980년 금강변의 공주시 상왕동에서 관개 용수를 위한 도수관이 금강의 물을 양수하여 이 고개를 넘어 계룡면 봉학리로 보내고 있으며 1984년 초에 대전시와 신도안 일대를 교육행정의 중추적 도시로 육성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무너미고개로 물이 넘어가게 된 것, 참으로 신통하지 않은가! 앞으로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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