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사회2부 부장 이원규

결혼식 날, 양가 어르신께 폐백을 올릴 때 신부의 치마폭에 대추, 밤을 던져주며 ‘아들딸 많이 낳고 잘 살아라’ 하며 덕담을 건넨다. 대추는 핀 꽃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고, 밤은 세 알이라서 삼 형제 정도는 낳아 집안의 대를 잘 이어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다. 밤은 우리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듯 수많은 가시로 덮어 보호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껍질을 벌려주며 세상 밖으로 밤톨을 밀어 내보낸다. 모든 씨앗은 떡잎부터 나오지만, 밤은 뿌리가 석 자 정도는 땅속으로 내렸을 때 비로소 떡잎을 틔운다.

과천시는 10월 초에 갈현동 밤나무 단지에서 ‘밤 줍기 체험’ 행사를 했다. 이미 1992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25년째다. 과천시는 관악산과 청계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현감을 하려면 과천 현감이지’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과천은 지금도 살기 좋은 고장이다. 서울 근교라서가 아니라, 옛날부터 밤을 비롯한 과일나무가 소득을 올려주어 백성들이 먹거리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마을지명에는 예로부터 귀하게 여겼던 밤과 관련된 율(栗) 자를 쓰는 곳이 많다. 과천시의 옛 지명에도 율목(栗木)이 있었다.

밤나무농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마을이나 흔하게 추석 무렵이면 밤송이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로 중무장한 채 뜨건 가을볕에 여문다. 체험 행사장에서도 아람이 벌면서 저절로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던 빛나는 갈색의 밤톨들은 허리를 조금만 낮추고 그냥 주워도 금세 한 자루가 꽉 찼다. 나무 막대기나 신발코를 이용해 살짝만 눌러줘도 밤알이 쏙 빠져나온다. 그런데, 어느 틈에 벌레들이 두텁고 단단한 껍질을 뚫고 들어와 파먹고 있다. 서너 알 이빨로 까먹으니 떫은맛이 가시면서 연한 단맛이 오래도록 입가를 맴돈다. 함께 줍던 어르신은 김치냉장고에 20여 일 정도 냉동 저장했다가 꺼내먹으면 전분이 당분으로 바뀌어 더 달다고 일러준다.

밤과 냉장고 얘기가 나오니 문득 펭귄 이야기가 떠오른다. 북극에 사는 펭귄은 온천지가 얼음판이라서 알을 낳을 곳이 없어 수놈의 두 발등 위에 낳는다고 한다. 일주일 후, 새끼가 부화하면 어미는 먹을거리를 잡아 오지만 새끼들에게만 준다고 한다. 새끼들을 얼음판으로 내려놓을 수 없는 아빠 펭귄은 새끼들이 다 크면 굶어 죽는다는 슬픈 이야기. 이처럼 사나운 사람을 ‘사납배기’라 한다. 즉, ‘사납다 + 배기’의 합성어로 발음은 〔사납빼기〕다. 겉모양이 고슴도치처럼 생긴 밤도 사납배기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던 대처 총리 같은 이가 밤을 닮았다면 큰 실례가 되겠지만, 겉보기와는 다르게 대처는 가정에서는 남편에게는 현모양처요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 사납배기였다고 한다.

밤 100g에는 비타민 B1의 함량이 쌀의 네 배나 되고, 비타민 D도 풍부해 인체의 성장발육을 촉진한다. 또한, 비타민은 물론 전분, 탄수화물, 단백질, 무기질 등 5대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영양식으로는 만점이다. 고운 피부를 갖고 싶은 여성이라면 밤의 속껍질을 활용하면 효과를 본단다. 속껍질을 잘 말려서 곱게 가루를 낸 후 꿀과 섞어 바르면 모공을 수축시키고 타닌 성분이 피부 노화를 방지한다고 한다.

옛말에 ‘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다’라고 했다. 밤은 날밤으로도 까먹기도 하지만, 떡이나 송편 등에 조금씩 넣어 찌거나 삶아 먹기도 한다. 주전부리가 귀하던 어린 시절 한겨울에 화롯불 앞에 빙 둘러앉아 구워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밤은 한 송이에 씨알이 세 톨씩 박혀 있어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제사상에서는 대추 다음으로 큰 어른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그날 보니 세 톨이 사이좋게 들어있는 게 있는가 하면 가운데 밤만 크고 양옆이 찌그러졌다거나, 반대로 양옆은 알이 큰데 가운데서 크지도 못하고 납작해진 밤도 보였다. 삼권분립,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 바로 그 모습이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