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남단의 돌산도에는 여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출 풍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하는 향일암이 있다.

암이란 암자의 이름부터가 해를 향해 있다는 뜻으로 이 절경의 향일암을 안고 있는 산이 금오산으로 비록 높이는 낮아도 명산이라 일러 부족함이 없는 산이다.

향일암에는 금거북이의 전설이 있는데, 풍수지리상 바닷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금거북이의 형상이라 한다.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뵈는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머리, 향일암이 선 곳이 거북의 몸체에 해당하며 산 이름은 쇠 금(金)자 , 큰 바다거북 오(鰲)자를 쓴 금오산이다.

한때 거북 구 자를 써서 영구암이라 부른 적이 있고 현재 영구암이란 편액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전설을 더욱 그럴 듯 하게 꾸며주는 것이 이 일대 바위의 무늬다.

바위마다 한결같이 거북의 등무늬를 닮은 문양이 나 있는 것이다. 향일암에서 백미를 이루는 경관은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향일암 뒤에는 어른이 흔들거나 아이들이 흔들어도 똑같이 흔들리는 바위가 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조금 작은 이 바위는 흡사 경전을 펼친 모양이라 이를 한번 흔들면 불경을 한번 읽는 것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흔들바위 입구에서 5분쯤 비탈길을 오르면 곧 시야가 확 트이는 바위지대에 이른다.

촛대바위, 기둥바위 등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경관은 산행길에는 좀체 보기 드문 선경이다.
이렇게 뛰어난 향일암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1984년 2월 29일에 문화재 자료 제 40호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여수 사람들은 이 산의 높이와 별개로 명산이라 부른다.

 한편 언제부터인가 여수시내 봉산동 678번지 인근 동네에는 돌로 깍아 세운 석인이 마주보고 있다. 

마을에서는 "장성" 또는 "벅수"로 불린다. 바람 비 수 백년, 만고풍상 세월속에 깍이고 헐린 민족의 시련과 함께 지나간 영욕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 깊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동네를 들어서는 위치에 서있는 쌍벅수는 바른쪽에 선 남자 벅수에 '남정중', 왼편의 여자 벅수에 '화정여'라고 음각되어 

 높이가 2m,넓이가 40cm, 두께가 30cm 가량이다. 운래는 나무로 깍아 세운 것이었으나 오랜세월동안 형체가 미멸되어 뒷사람들이 이를 다시 돌로 쪼아 세운 것이다.

"벅수의 코를 갉아서 먹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녀자가 임신할 수 있다." 는 구전 때문이었는지 현재의 쌍벅수의 얼굴에는 유독 코만 닳아져서 없어져 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흔히 여수 사람들은 이곳을 "벅수골"이라고 불러온다. 연등동과 공화동등 다른 지역에도 벅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별나게 이곳만을 "벅수골"이라고 부르게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봉산동 일부 지역에는 사철동이라 부른 곳이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봉강동 의관산에서 캐온 철석을 녹여 충무공 휘하의 좌수영 수군이 사용하는 활촉,군검과 장못 따위 군사무기를 만드는 풀뭇간들이 있었다.

이같은 연고로 이곳은 외부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 그래서 이 경계지역에 수문장격인 벅수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경계표시로 삼았거나 봉산마을 주민들 이 마을의 무사와 행운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벅수는 원래 우후인이라고 해서 지역경계, 수문장, 민단신앙등의 대상으로 나무와 돌을 막아 눈,코,입 등을 갖춘 사람 형상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종고산에는 국난을 알리는 산울림이 세번씩이나 울렸다 한다.

1822년의 큰 가뭄때문에 주민들이 종고산과 구봉산 상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는데 3일만에 흡족한 비가 내려 대풍을 이뤘다 한다.이때 고마움을 잊지못한 종고산과 구봉산아래 주민들은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 저녁에 다섯사람의 제관을 뽑아 산제를 모셨다 .

주민들은 제를 지내는 기념으로 향토를 지키는 수호신격으로 남정중, 화정여라고 새긴 연등동 국도변 벅수를 비롯 봉산동 입구와 공화동 동국민학교 근처에 쌍벅수를 세워 매년 동제행사 때마다 벅수에도 밥을 차려놓는 헌식을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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