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는 39년간 고려 수도…‘고려의 꿈’ 되살린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최근 강화도를 방문했다. 고려궁지와 송암 박두성 생가 복원터를 방문해 ‘강도(江都)의 꿈’ 프로젝트 추진 상황을 확인했다. 유시장은 “강화는 한강 이남에서 유일하게 고려 왕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인천만이 지닌 귀중한 역사이자 문화 자산”이라고 말했다. 시는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강화 고려궁지 범위 조사를 위한 용역을 추진 중이다.

◆내년 고려건국 1100년

내년은 고려가 건국된지 1100년 되는 해이다. 918년 왕건은 폭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웠다. 강화는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고려의 수도였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도읍지를 강화로 옮긴 뒤 39년이나 버텼다. 강화에는 고려 유적이 넘쳐난다.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는 전쟁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피난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모델로 건설된 고려의 정식 도읍지였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황제의 도읍’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가운데서 강화를 한 나라의 도읍지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232년(고종 19년)부터 1270년(원종11년)까지 강화는 고려 도읍으로서 황도의 역할을 수행했다. 천도는 급하게 이루어졌지만, 강도(江都)는 무계획적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천도 이후 강도는 “비록 천도한 초창기이나 구정(毬庭)·궁전(宮殿)·사사(寺社)의 이름이 모두 송도(松都:개경)에 따랐고 팔관(八關)·연등(燃燈)·행향(行香)·도장(道場)이 모두 옛 방식 그대로였다.”라는 「高麗史」의 기록처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즉 강화는 또 하나의 개경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한 나라의 도읍이 자리했던 고도(古都)였다.

◆강화도성에 고려 숨결 가득

강화가 고도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흔적이 왕궁과 왕릉이지만, 강화엔 고려궁이 소실돼 그 터만 남은 상태다. 대신 강도(江都) 시기에 조성된 왕릉이 강화가 고려의 수도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강화는 남한에서 고양시 공양왕릉을 제외하고 개성 주변에서만 볼 수 있는 고려 왕릉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강화에는 고종의 홍릉, 희종의 석릉을 비롯한 4기의 왕릉과 묻힌 이를 알 수 없지만 왕릉급이 분명한 석실분도 몇 기 있다. 발굴을 통해서 강도 왕릉의 구조는 개경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질 좋은 자기와 구슬,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의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강도가 자리했던 강화읍 일대를 에워싼 성곽, 즉 도성이 남아 있어 강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도성은 판축으로 쌓은 토루 위에 다시 흙으로 그 위를 덮는 토성으로, 강화읍 동쪽 구간을 제외한 길이가 약11km다. 성벽이 확인되지 않은 동쪽 해안 구간까지 포함하면 강도 도성의 길이는 약 16~17km가 된다. 이는 둘레 약 18km인 조선시대 한양도성과 비슷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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