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동향을 알리는 통신시설로 낮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

아버지 김산수의 자는 군경(君卿), 호는 덕계(德溪)이다. 아들 김득복의 자는 진옥(振玉), 호는 동호(東虎)이다. 집안이 청도에서 살다가 경주지방으로 이사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처가와 외가가 울산과 인연이 있으므로 경주·울산지역의 의병장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다.

7년 왜란의 무수한 전공으로 선조 38면(1605)에 아버지 김수산은 선무원종 3등공신에, 아들 김득복은 선무원종 1등공신에 봉해졌다. 특히 김득복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명나라 원정군의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하여 동호(東虎)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임란공신 김득복의 묘는 죽성이나 대변에서 해안을 따라 2~3분정도 달리면 해안초소가 나오고 건너편 산을 오르면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 행정번지를 굳이 따진다면 기장읍 대변리 산5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1592년 임진왜란당시 우리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렬히 싸운 김산수 장군과 김득복장군 부자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들 부자는 1562년 지금의 일광면 칠암리에서 출생 하였다.

김득복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의 문천에서 각처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울산에 있는 반구동에서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결사동맹을 하였다.

이눌, 황희안과 대왕암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판관 박의장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왜적 4백여명을 참수하고 양산으로 진격하는 왜적 70여명을 참수하고 10월에는 울산으로 가서 안시명,윤홍명,서충인,장희춘,권사 악,최계종,박춘무,안국보,견천지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갑오년 3월에 불국사로 진을 옮겨 당교(唐橋)아래에서 왜적 수백명을 무찌르고,큰 전과를 올 렸는데 이 울산 아산도역(兒山島役)에서 김산수공이 순절하였다.

10월에는 견천지,박이손,김흥위,김응택을 인솔하여 밤중에 고개를 넘어서 다시 당교에 가서 배 30척,창,화살,쌀 등 무기와 군량미를 운반하여 왔고 병신년에는 권응수와 함께 말 19마리, 소 27마리,군사 800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영천에 가서 류백천을 도왔 으며 또 팔공산에 가서 대첩을 하였고 정유년에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곽재우 장군휘하에 서 전공을 올렸다.

이렇듯 울산지방에서 기병하여 양산,동래,언양,경주,대구팔공산,영천,금오 산,화왕산,서생포전에서 전공을 올렸다.

공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고 의기가 높아 명장 마귀제독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하여 동 호장군이라 불렀다.

임란후 선조 즉위 38년에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김산수 장군은 선무원종 삼등공신 가선대 부동지중추부사,김득복 장군은 선무원종 일등공신 가선대부동지돈녕부에 추종되었다. 장군은 8년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인조6년에 67세로 돌아가셨다. 장군의 묘는 울산염포에 있었는 데 후에 이곳에 이장되어 1977년 후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이 재단장되었다.

또 약 370년의 세월이 흐른 1977년도에 10대손 일광면 칠암리에 거주하는 김진옥,김성백씨 등이 그들의 가 보에 得福宣武一等原從功臣墓在機張南山甘浦라는 글구를 보고 문교부에 공신 사실여부에 대 한 조회를 한 결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있다는 회보를 받았다.

기장군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장군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널리 알리 고자 비지정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김산수,김득복장군의 묘는 동해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이 곳에서 누워 우리의 동해를 지키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이곳에 오면 바다와 산이 어우러지는 절경을 만끽하고 세상살이에 찌들린 우리 몸과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장소이다. 

한편 이길 봉수대는 해안을 따라 침입해 오는 왜적들의 동향을 중앙으로 알리는 통신시설의 하나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되 일정하게 조직된 봉수망을 따라 전달되었다. 

불빛과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가 정해져 있었고 비나 궂은 날씨로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뛰어가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전국의 봉수망은 크게 다섯 갈래의 원봉이 있고, 원봉에 연결되는 간봉이 있었는데 간봉은 주요 봉수망으로 각처의 군사정보를 알리는 곳이이었다.

경상도 지역에는 원봉 34개소에 90개의 간봉이 있는데, 이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기장남산, 북쪽으로는 가리봉산의 봉화대가 연결되었으며, 경주지역을 거쳐 중앙으로 연결되었다.봉수망은 고려시대에 정비되고 조선 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이곳도 세종 때 봉화대를 만들던 규칙과 일치하고 있다.

중앙의 봉돈은 높이 2.4m , 지름 9m의 돌로 쌓은 것으로 그 바깥으로 높이 1.5m , 너비 1.5 m , 지름 30m쯤의 돌로 쌓은 담장과 지름 40m쯤의 담장이 바깥과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다.이곳에는 오장과 봉졸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켰다.

각처에 남아있는 봉수대들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1987년 5월 19일 경상남도 도지정 기념물 제 84호로 지어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8호로 재지정 되었다.

이길 봉수대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은 1997년 국고보조사업으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되었다. 이에 따라 붕괴된 중앙 봉돈과 주변 내, 외 석축이 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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