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질 때면 안지랑이골 밑에 70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지금부터 1000여 년전, 싸우다가 도망가던 고려의 왕건이 기진맥진한 채 비슬산 기슭에 이르러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바위가 대구 앞산 안지랑골에 있다.

 약수터로 알려진 이곳의 전설은 거짓말인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이 역사를 보면 고려 군사가 대구 근방에서 싸운 것은 왕건과 견훤의 싸움뿐인데 이때 패주한 왕건은 비슬산 쪽으로 간 것이 아니고 경산쪽으로 갔다 고 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런 전설을 안고 있는 안지랑이 4,5십년 전에는 대구 제일인 여름 안식처였다. 당시 그 곳은 지금과 같이 메마르지 않고 산림이 울창했고 중턱에 있는 안일암과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대구 시민은 연중행사처럼 여름철이면 거기를 찾아 들었다. 광복이나 삼베로 개울에 천막을 치고 약수에 목욕을 하는 것이 시민의 그지없는 낙이었다.

더구나 엉성한 가설 천막사이로 벌거벗은 여인들이 물을 덮어쓰며 시원해 하는 광경들은 오랫동안 시민들 사이의 화제로 남아 있었다. 그 때 시민들은 약수터에 가는 것을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인 동시에 보건 하는 한 가지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무더운 날이면 솥과 냄비와 반찬을 준비한 가족 야유회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좀 넉넉한 사람들은 산밑까지 마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마차는 지금 대신동파출소 있는 곳에서 출발했는데 전세와 합승마차 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나 상급관리들은 그 당시로는 최고급인 '하이야'를 타고 가기도 했다. 저녁노을이 질 듯한 저녁때가 되면 안지랑이골 밑에 70여 대의 마차가 줄을 지어 서고 몇 대의 하이야 까지 끼어 일대장관을 이루었다. 

이 곳은 특히 가정주부들이 좋아했던 것인지 많은 여인들이 한둘 혹은 몇 사람 이 어울려서 수십명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가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안지랑골서 물맞고 오다가 기에서 서나기 맞고 집에 와서 남편한테 매맞는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해가 기울어지면 이 번잡한 야외향연도 시들해지고 여기저기 노랫소리와 함께 술에 취하고 물에 취한 남녀들이 비틀거리며 내려온다. 특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나온 여인들이 장고를 치고 춤으로 너울거리면서 (20여 년 전에는 없었지만) 대명동 공동묘지 길을 넘어오는 광경은 기이했다. 

여기저기 긴 그림바를 몰고 솟은 무덤사이로 흥겨워서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는 여자들의 모양은 인생무상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약수터는 이 곳 뿐만 아니라 영천의 황토물터, 가창의 약수터, 칠곡의 나박탕 등이 인기가 있었다. 특히 옥포 용연사 약수터는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이 곳은 일인이 관리를 하고 있어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일인은 지독한 구두쇠라고 한푼도 에누리를 하지 않았다는데 한국 땅에서 나오는 한국인의 물을 왜놈이 돈 받고 판다해서 비난이 높았다. 마침내 그런 꼴을 보고만 있던 그 왜인의 사용인이었던 한 한국청년이 그 자를 찔러 죽여 버렸다. 일본 경찰은 이 민족적 살인범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 용감한 청년은 오늘날까지 이름이 누군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일본의 억압과 학대 속에서도 대구 시민은 이런 약수터를 그들의 유일한 휴양처로 삼고 즐겨왔다.

대구 인근에 있는 합천읍에서 초계쪽으로 약 4Km가량 가면 문림리에 개비리고개라는 길이 있다.

지금은 광주∼울산간 국도 24호로 폭이 6m로 넓혀져 많은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으나, 옛날 신라말엽 합천고을의 개(수컷)들이 초계고을 개(암컷)를 만나려면 이 암벽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러나 암벽으로 둘러쌓인 이 산마루는 높고 수십길 아래에는 황강물이 흐르고 있어 개들이 서로 쉽게 만날수가 없었다.
그런데 용기있는 합천 고을의 개 한마리가 이 위험한 절벽을 타고 고개를 넘어 초계 고을 개와 사랑을 맺은후 연달아 다른 개들도 오고가고 했는데, 이를 본 두 고을사람들은 개들이 보다 편하게 다닐수 있도록 벼랑의 고갯길을 트이게 해주었다.

또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창녕을 거쳐 합천으로 침공할 때에 이 개비리고개에 이르자 울창한 숲과 암벽의 높이가 수십척에 이르러 길이라고는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벼랑길 뿐이었다.

이 개비리고개는 천마봉,견환봉, 영귀봉,무월봉, 관어봉으로 부르는 5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둘레2m, 길이10m가량되는 석용이 나타나 길조라고 큰잔치를 벌였는데 머리부분은 합천공략을 담당했던 아비라라는 왜장이,꼬리부분은 내무주임으로 있던 구껜이 일본으로 가지고갔다는 설도있다. 

二樂堂 周怡(주이)의 후손들이 임난때 불타 없어진 호연정을 지금의 정면3칸 측면2칸의 단층목조건물로 다시 지었다.

이곳의 경치는 명사 10리사방이 확트여 있고 울창한 숲과 높은 절벽의 개비리 벼랑 아래 물맑은 황강이 흘러 절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음력 8월16일에는 합천군내 선남선녀들이 이곳 개비리 고개를 찾아와 호연정 넓은 뜰에서 하루를 즐기는 풍습도 있었는데, 갓 시집간 딸이 해를 넘기기 전에 친정나들이가 허락되지 않던 옛시절에 이날만은 이곳에서 친정식구들과 만나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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