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 선녀들이 강경 산마루에 내려와 절경에 심취

강경읍 서창리, 북옥리 사이에 강경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 한번 다녀간 선녀들은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지만 옥황상제의 딸은 한번도 내려오지 못했다. 선녀들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은 어렵게 허락을 받아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다. 

맑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참으로 별천지 같았다. 그녀는 절경에 심취하여 올라갈 시간조차 잊고 있었다. 

하늘나라에서 올라오라는 나팔소리를 3번씩이나 듣고서야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올라가려고 서둘렀다. 그녀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한쪽 가슴을 보인 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옥황상제는 "여봐라, 저기 앞가슴을 내놓고 올라오는 자가 누구냐 , 당장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고 영원히 그 땅에 살도록 떨어뜨려라"하며 노하여 말하였다. 

그녀는 옥황상제 명에 의하여 이 땅에 홀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이 땅에 머무르면서 매일 산위에 올라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천상에 올라가기를 애원하였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여기에 살면서 옥녀라고 불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옥녀는 산위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는데 옥녀의 앞에 거울이 하나 떨어졌다. 

그 거울을 주워서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 거울 속에는 그렇게도 그리던 하늘나라의 궁궐이 보였고 옥황상제인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그 후에도 옥녀는 매일 산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면서 거울을 쳐다보고, 옥황상제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옥황상제인 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하늘나라에서는 부르지 않았고, 옥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옥녀가 죽은 후 시신과 거울을 돌로 만들어 훼손하거나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도 이 산위에는 봉우리 진 곳이 있는데 이곳을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위용대가 되었다.

한편 옛날  곰나루에 살던 한 사내가 하루는 인근에 있는 연미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고 배가 고파서 바위 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났다. 사내는 처녀와 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 굴을 나갔다가 음식을 가져오는 처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뒤를 쫓아가 보니 처녀가 곰으로 변하여 사슴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후 처녀는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을 알고 사내를 바위 굴 속에 가두어 놓았으며 사내는 암콤과 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 았다.
 
어느 날 암콤이 바위로 굴을 막지 않고 나간 틈에 사내는 도망을 나와 금강을 헤엄쳐 건넜다. 뒤늦게 이를 알고 쫓아 나온 암콤이 멀리서 자식을 들어 보이며 마음을 돌리도록 호소하였지만 이 사내는 매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암콤은 어린 자식들을 안고 금강에 뛰 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후부터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일이 많아 나루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곰내.웅진 또는 곰나루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1972년 이 나루에서 돌로 새긴 곰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곰사당인 웅신당을 지어 모시고 있다.
 
고려 초부터 부르기 시작한 공주라는 이름은 공주의 진산인 공산이 '공(公)'의 글자와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곰주'가 음이 비슷한 '공주'로 바뀐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또 용당은 문주왕이 이곳에 도읍을 옮기자 금강가에 용왕제를 지내는 용제당을 둔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웅진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소정(小亭)이라 하고, 그 앞들을 '소 정이 벌'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 하며, 이 벌판에 지금도 ' 웅진도독부터' 또는 '소정방장대 터' 등의 욕된 발자국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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