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을 어찌 몰라보고 참하였느냐?" 그러니까 영구도 움직였는데~

의적 갈봉은 조선조 말엽에 삼산면 상촌마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갈봉의 어머니가 갈봉이를 출산하는 날 한 도사가 찾아와서 마루에 걸터앉아 남쪽 먼 하늘 위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저 구름이 사라지기 전에 출산해야 한다고 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갈봉 어머니는 피어오르던 구름이 사라져도 갈봉이를 낳지 못했다. 
다시 남쪽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깔리고 금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때 갈봉을 낳았다. 
그러자 도사는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아까운 장군 인물을......"다른 하나이야기는 갈봉을 출산하는 날 도사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물었다. 

"장군 낳았습니까?" 이 때 갈봉이 어머니는 기미만 있을 때였다.

다시 도사가 바깥에서 천기를 보며 두리번거리며 서둘러 물었다. "도련님 낳았습니까?" 이 때는 갈봉이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들릴 때였다. 도사는 천기를 보다가 노기띤 얼굴로 또 물었다.

"역적 낳았습니까?" 이 때 천지를 진동하는 큰 사내의 울음소리가 응애하면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도사는 어디로 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갈봉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남달리 총명하였다. 그러나 갈봉이 어머니는 엿장사를 하면서 생활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해 갈봉을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다. 갈봉은 매일같이 집이나 지키면서 놀았으나 노는 행동이 무식한 어머니에게도 비상하게 보였다. 엿을 만들어 시렁에 올려놓고 장사를 하고 돌아오면 엿이 줄어들고 하여 하루는 어머니가 장사가는 척하고 집 뒤에서 갈봉의 거동을 살펴보았다. 

갈봉은 바깥을 몇번이나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더니 조그만 철판을 철사줄에 매어 화롯불에 뜨겁게 달군후 가는 철사의 끈을 잡고 시렁의 엿그릇에 던져 엿이 뜨거운 철판에 녹아 붙으면 뜯어먹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어른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보통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갈봉은 마음이 정직하고 어질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미로 성장하였다. 

탐관오리나 욕심많은 부자의 재물을 사정없이 훔쳐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탐관오리나 부자 양반들은 도적으로 갈봉을 조정에 고발하였다. 그리하여 갈봉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갈봉은 포졸들에게 잡혀 진주감영에서 모진 고문과 곤장으로 감영의 이슬로 사라졌다.

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후 동네 어른들이 쳐다보니 죽은 갈봉이가 진주감영의 영장을 죽여야 한다면서 진주 감영으로 갔다. 
갈봉이 감영에서 죽을 때 도부수는 갈봉과 같은 시간에 절명하였고, 훗날 감영의 영장도 신음하다 죽었다. 영장이 죽어 영장의 영구를 고향인 한양으로 옮겨 가는데 피옷 입은 갈봉이가 호상하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서 따라왔다.

호상하는 사람이 온갖 회유를 하여 갈봉이를 쫓아보내려 하였으나 가지 않았고, 영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장의 아버지가 아들의 부음을 듣고 달려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아들의 시체를 길바닥에 끄집어 내어놓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인을 어찌 몰라보고 참하였느냐?" 그러니까 갈봉이가 돌아가고 영구도 움직였다. 갈봉은 의적이었으나 도적으로 잡혀 죽었으므로 후손을 찾을 길이 없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갈봉의 묘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옛날 어느 박씨 처자가 시집을 왔는데 알고 보니 남편되는 사람이 나환자 였다. 혼례를 올릴 때는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운 것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극진히 남편을 받들었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또한 극진히 모셨다. 
남편이 문둥이라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박씨는 재산을 가지는데 많은 집착을 보여 박씨네 집은 나중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시아버지가 마을에 열녀문을 세워 그 고마움을 표하였다. 박씨가 늙어 재산을 물려줄 사람이 없자, 양자를 들여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박씨가 죽자 양자는 모든 논밭과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버렸고, 박씨의 무덤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가시덤불로 덮여서 아무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재산을 양자가 아니라 마을에 기증을 했다면 마을에서 제사를 마을공동으로 해주고 무덤도 관리했을 텐데. 그런데 다른 이야기로는 박씨가 늙어 임대를 해준 논이나 밭에서의 일하는 사람들이 그 삯을 떼어먹고 갚지 않았다. 돈밖에 없고 자식도 없던 박씨는 그 억울함을 그대로 삭혀야 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양자를 세워 자신의 제사를 맡겼다한다. 지금도 멀리서 무덤이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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