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건 당시 궁궐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 고문 다이(Dye, W.M.)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Sabatin, G)이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들에 의하여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미국대리공사 알렌(Allen, H.N.) 등 각국 외교관들에게 사태의 진상이 즉각 폭로되어 미우라의 사건은 일본이 계획적으로 한 작전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일본은 국내외로부터 빗발치는 여론의 비판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고무라(小村壽太郞)를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는 체하고,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로 파견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을미사변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파문을 몰고 왔다. 일본의 위신이 추락되었고,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하여 반일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듬해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하게 된 것도 일본의 과도한 내정간섭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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