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인천 첫 공식 방문해 사업가들에게 일장 훈시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기 36년’이라는 씻을 수 없는 역사가 생겨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그는 일본 메이지유신을 탄생시킨 하기시 출신이다. 생전에 여러 차례 인천을 방문했다. 1898년 조선을 첫 공식 방문하기 위해 한양으로 들어올 때 인천을 거쳤다.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 조선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조선통감으로서 인천을 찾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조선을 22번 방문했다. 경부선이 완공된 1905년전까지는 여러 차례 인천을 통해서 한양으로 오갔다. 지금의 인천 중구청 인근에 그가 묵었던 숙소도 있었다. 영친왕을 일본에서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갈 때도 인천을 통했다.

◆이토, 인천을 여러차례 방문하다.

1907년 10월 16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황태자는 조선을 강제병합하려는 일본 대신들의 요청에 의해 조선을 4박5일 방문하고 20일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1898년 8월 총리에서 물러난 이토는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을 방문한다. 당시 인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부사(仁川府史)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토히로부미 후작이 인천에서 일장연설을 시도했다. 러일협상에 대해 공식적인 자리에서연설할 생각이었는 데 무역에 종사하는 관민의 초대를 받아 의견을 발표했다. 이토는 한양에서 누구도 받아보지 못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 조선의 군사권을 빼앗는다. 이토는 3월 17일 특파대사로 인천에 도착한다. 조선 관리들의 환대를 받는다. 대한제국 대신인 민영환 등 10여명이 인천에서 그를 맞는다. 이토는 인천 부두에서 일본영사관까지 걸어서 간다. 거리에는 수백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사관에서 휴식 후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토는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일본에서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경부선 개통 후에는 주로 관부연락선으로 부산으로 온 후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입성했다.

1907년 12월 이토는 영친왕과 함께 인천에 온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다. 영친왕은 이토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07년 지방 순행차 수원을 지날 때 조선인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이토가 묵었던 인천 중구청 인근 여관.

인천 중구청 담벼락에는 근대를 상징물들이 많이 새겨져있다. 청일조계지 계단, 최초 등대, 최초 호텔 등 개항기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담벼락 끝에 4층짜리 연립주택이 있다. 이 자리에는 1897년 ‘아사오카(淺岡) 여관’이 있었다. 처음엔 요리점으로 문을 열었다가 여관으로 바뀌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올라갈 당시 자주 묵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여관은 최고급이었다. 일본성의 텐슈가쿠(天守閣) 형식을 빌려 지은 일본식 목조 4층 건물이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눈썹 지붕을 달았고 4층 지붕은 4면을 모두 합각지붕처럼 보이게 했다. 당시 일본이사청이 있던 지금의 중구청 인근에는 숙박시설이 몰려있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있었고, 그 건너편에 하나야(花屋)여관, 인천중동우체국 건너편 아사히야(旭屋)여관, 하라킨(原金) 여관 등이 모두 3층이었다.

1905년 11월 이토가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맺을 당시 이 여관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토는 여관에서 무엇을 생각했을 까. 고종과 조선을 대신을 겁박해 효과적으로 늑약을 맺는 방법에서부터 조선을 뛰어넘어 만주까지 호령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사오카여관은 광복 뒤 귀환동포 수용소로 사용되다 헐리고 지금은 다세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만석동 유흥가 팔경원을 종종 찾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총독 시절에 인천 만석동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된 이유는 만석동에 위락시설인 팔경원(八景園)이 있어 이 곳을 종종 들렀다고 한다. 팔경원에는 술과 여자가 있었다. 여자를 밝히는 이토 히로부미가 머리를 식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생전에 그는 수많은 서류와 일에 파묻힌 후 젊은 여성의 시중만이 자신의 피로를 풀어준다고 했다.

만석동 전망 좋은 곳에 2층 건물인 팔경원이 지어진 것은 1906년도이다. 여섯 일곱채의 객실과 고급 음식점, 해수탕을 갖춘 위락시설이었다. 당시 만석동은 해양관광지로 일본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묘도 주변으로 작은 모래사장과 탄력있고 부드러운 갯벌 그리고 맑고 시원한 물이 있어 최적의 해수욕장으로 소문났다. ‘조선 최초의 해수욕장’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잡지에도 소개됐다.

개항후 인천항과 자유공원(당시 만국공원) 일대에 자리를 잡아가는 일본인들은 만석동으로 눈을 돌린다. 만석동을 매립해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인들은 신흥동에 자리잡은 유곽(술도 팔고 여자 몸도 파는 곳이 몰려있는 곳)을 흉내내 만석동에도 유곽을 포함한 대규모 유흥가를 지으려 했다. 팔경원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만석동의 유흥가는 실패한다. 너무 외지고 교통도 불편해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도 찾아왔었지만 장사가 안돼 결국 유흥가는 문을 닫는다. 이후 중국인의 채소밭으로 전락하고 일부는 잡초만 무성한 빈 땅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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