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병에 걸린 두 남 여의 죽음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옛날 진주시 동성동 쪽에서 남강으로 내려가는 길을 다시 왼쪽으로 돌아 동쪽으로 10m쯤 가면 지금은 땅에 묻혀서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 그 자리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여 있던 돌다리가 하나 있었다. 

고적보존을 위해 용다리를 파내어 옛 모습대로 찾아내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난적이 있다. 이 용다리는 그 옛날 진주성의 동문을 들어오는 길목이었으며 40∼50년 전에는 소전 거리였다.

이 용다리에는 머슴이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하여 미쳐서 남강에 빠져 죽은 슬픈 이야기가 하나 남겨져 있다. 

머슴이 상전의 딸을 사랑했다면 옛날에 능지처참 감이었다니 어디 돌쇠라는 성도 없는 상놈이 양반 집 규수를 얼굴인들 맞댈 수 있었겠습니까, 관찰사 밑에 이씨라는 군수가 있었는데 아들 복이 없었던지 딸만 셋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딸이 불행히도 출가하여 남편이 죽자 집에 돌아와 수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의 관습제도가 개가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니 아마 시대를 추측하건대 고려 초기인 듯 하다. 

그때는 남몰래 보자기로 씌워서 밤중에 과부를 훔쳐 가는 보쌈 이외는 개가시키는 양반 집은 상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쇠는 군수의 딸이 돌아온 뒤부터는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시중을 들었으나 그때부터 돌쇠의 눈엔 이상한 핏발이 서고 군수딸을 만날적마다 몸가짐이 이상하고 어느때는 멍청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사랑은 계급도 신분도 체면도 없는 듯 독수공방을 지키던 군수의 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절히 보살펴 주는 돌쇠가 어쩐지 모르게 좋아졌다. 

그러나 어떠한 세상이라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 지척이면서 만리보다 먼 상사병에 걸린 두 남 여는 벙어리인양 가슴만 태우고 손목 한번 못 잡아 보고 군수의 둘째딸은 시름시름 하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울지도 못하고 미칠 것 같은 돌쇠는 성내에서 선학재 넘어 장사 지내러 가는 길목인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에 자기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물에 비친 자기얼굴이 꼭 죽은 귀신 같다가 죽은 군수 딸 얼굴 같기도 하여 "아씨-"하고 고함치다가 그만 미쳐 버렸다. 

함께 가던 하인이나 일꾼들이 아마 아씨가 죽어서 슬퍼하는 줄만 알았지 짝사랑하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군수도 딸을 잃고 이곳에 정이 떨어지자 충청도로 벼슬자리를 옮겨가며 용다리를 건너가는데 뒤 따라와야 할 돌쇠를 부르니 보이지 않기에 사람을 놓아서 찾아보니 벌써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 목을 메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여태까지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 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치 미친 돌쇠가 중얼거리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그 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제일 많이 모여 우는데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개구리 울음이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수십년전만 하여도 해 가진 다음에는 남강에서 혼자 빨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하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왔다갔다하면 씻은 듯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돌쇠가 못 이룬 사랑을 남에게는 이루게 하는 지성이라고들 이야기한다. 6.25전 까지만 해도 돌쇠가 목메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이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의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한편 진주성내에 있는 충의당은 공북당의 자리이다.그 곳은 또 고려 시랑 하공진이 태어난 태지이기도 하다.
그 터에 관아의 하나인 공북당을 지을 때의 일로, 공역으로 집을 짓는데 낮 동안 집의 뼈대를 지어 놓았다가도 이른 새벽에 나가 보면 집이 무너져 있었다.

이러한 일은 한번 두 번도 아니고 거듭되었다. 지어야 할 날짜에 못 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예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급기야 방백은 나졸들에게 일러 밤에 지키도록 하였다. 그 날 밤이었다. 밤중이 되자 한 장군이 위엄있는 장군복을 입고 나타나더니 "여기는 내가 태어난 자리인데, 너희들이 무례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느냐, 헐어도 또 짓고 헐어도 또 세우니 또 헐어 버리도록 하라"면서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군을 옹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달려들어 일시에 허물어버리는 것이었다.

밤을 지킨 나졸들은 방백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죄다 보고했다.

그제서야 방백은 말하기를 "아! 우리가 잘못했다. 거란군이 침범하여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 가실 때 자신의 볼모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케 하시어 구하신 그 어른의 태지에 우리가 집을 짓다니 큰 잘못이다. 그러니 그 어른 집부터 먼저 짓자".

그런 뒤로부터는 헐리는 일이 없었다. 공북당을 지으면서 시랑공의 집이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공북은 공진과 같은 탓으로 "진(辰)"자도 북쪽(북극성)을 뜻을 지닌 까닭이라 했다.

또 진주에는 봉산이 있다. 봉황새는 오동에 깃들고,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고 죽실을 먹고산다. 그래서 산에는 오동을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가꾸었다.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고 하는 전설적인 믿음과 소망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것이다.
진양지의 관기총설에는 비봉산을 봉으로 설정하고 대룡, 중룡, 소룡사를 비봉산 둘레에 창건하여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죽실이 유용한 때가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지리산 남북의 마을은 그 소용돌이에 곤욕이 큰데다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마을에서는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올라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를 벗겨 먹는 등 초근목피로 연맹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7·8월경에 산죽이 결실하여 죽실 추수가 수만포대에 이르는 이적이 일어났다.

죽실의 낱알은 보리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보다는 약간 작았고, 잘 고르면 밥도 지을 수 있지만,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로 끓일 만 했다.

죽을 쑤어도 되었으며 술을 빚어도 되는, 그런 비상 음식물로 죽실이 대용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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