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 프로필

방송인으로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잘생긴 얼굴이 있다. 시 창작은 물론 그림으로도 이미 30여 회 이상 전시회를 연 중견 화가로 변한 손철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줄기차게 추구했던 ‘세월 멈추기’ 작업은 살아온 날의 도정에서 생의 의미를 되찾는 지상 최대의 목표이었는가 보다. 머리카락만 은발로 하얘졌을 뿐 여전히 건강미가 넘친다. 여덟 번째 시집은 『세월 멈추기』는 책의 판형이 가로로 약 5센티미터 정도 커서 일반적인 시집과는 다른 정사각형이다.

제1부 「인생, 굽이굽이 험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다」에 43편, 제2부 「사랑,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23편, 제3부 「추억, 끝없는 기다림을 낳다」 23편, 제4부 「죽음,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들에 대하여」 19편 등 인생, 사랑, 추억, 죽음에 대해 번뇌하며 썼을 주옥같은 시 108편과 ‘행운, 포용, 늘 미소로, 행복, 정, 평화, 꿈, 님, 사랑, 추억’ 등 문자를 상형화한 그림 27점이 마치 측은지심의 뜻을 전달하는 듯하다. 특히, 제1부 인생 편이 다른 편에 비해 두 배정도 많은 그 깊은 속뜻도 뒤늦게 알아챘다.

해랑달 단체사진

‘청양군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끼고 에돌아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어느 틈에 알록달록한 긴 소매 옷으로 갈아입고 앞서 걷는 사람들 마치 단풍 들기 전 나뭇잎을 똑 빼닮았다. 급하게 뒤따르는 발치로 떨어지며 나보란 듯 빛을 내는 도토리, 밤톨들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잡아끌 듯 오라오라 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진돗개, 염소, 거위, 오리, 닭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찾아오는 이들을 반긴다.
 
잘 아시다시피 손철 시인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 후, 1973년 TBC 동양방송에서 ‘살짜기 웃어예’로 데뷔한 개그맨 1세대 방송인이다. 그는 한때 ‘가로수를 누비며’에서 송영길, 허원, 임성훈, 최미나 등과 함께 공개방송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고전유머극장’,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등에서는 코미디언 이주일, 이상해 등과 더불어 우리에게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 코미디뿐만 아니라 명사회자로 그 이름을 날렸으며, 1989부터는 KBS 희극인 실장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정주고 마음 주며 몸담았던 방송계를 그것도 한창 잘 나갈 때 과감하게 내려놓고 칩거에 들어갔다. 

세월 멈추기 내지

고향 땅,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여우내길 104번지.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의 길을 위해 3천여 평 대지에서 잡초를 뽑고 꽃나무를 옮기고, 여기저기에 박힌 큰 돌 작은 돌을 굴리고 묻고 박고 깔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1998년 초여름, 드디어 칠갑(七甲) 손철 시인은 택호를 ‘해랑달’로 짓고, ‘예 오는 모든 이들 별이 되어라’라 외치면서 지인들을 초대했다. 초대라기보다는 지인들이 산으로 들어간 그가 보고 싶어 스스로 찾아왔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게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 달처럼 탐스런 하이얀 얼굴 /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 긴 머리 소녀야~’라는 아름다운 노래는 젊은 시절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1974년, 유행했던 이두진 작곡, 둘다섯이 불렀던 <긴 머리 소녀>의 원작사자가 바로 손철 시인이란다.

지난 9월 22일(금요일) 12시부터 16시까지 칠갑산 자락 「해랑달」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낯익은 사람들이 좌석을 꽉 채웠다. 지난 5월 5일은 봄맞이로 이곳에서 한국문학신문 주최 전국시낭송경연대회와 작은 음악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이번에는 가을맞이로 어김없이 사람들을 초대하는 문화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날의 행사는 사단법인 한국국보문인협회(이사장 임수홍)과 주식회사 에코미코(회장 손철)가 주관했다. 다시 말하면 친환경사업체인 에코미코 회장으로 취임하는 축하의 자리도 겸했다. 그래서인지 악기 연주, 초청 가수들의 노래와 시 낭송 퍼포먼스까지 곁들인 작은 음악회는 마치 잔칫집처럼 흥겨웠다.

세월 멈추기 표지

손철 시인의 화실 앞마당에 설치된 공연무대인 ‘사랑마루’ 위로 데뷔 40년 차인 명품 김호 MC가 올라가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한껏 분위기를 잡는 색소폰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어서 강해인 시낭송가가 흰색 드레스로 곱게 차려입고 송수권 시인의 ‘여승’, 윤양옥 시낭송가는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를 낭송했다. 두 편 모두 세속에서 얽힌 인연과 아픔을 다룬 절창이다. 퍼포먼스는 모락 권정찬 화가가 큰 붓으로 먹물을 듬뿍 찍어 바닥에 깔린 천에 부엉이를, 신평 김기상 서예가는 천을 세워 ‘가을꽃 향기 좋은 날’이라는 일필휘지로 붓을 휘둘려 보는 이들에게 가을꽃 한 다발을 선사했다.

이어서 휘파람새 이하령, 청양출신 가수 윤서원, 음유시인 현승엽, 음향까지 담당했던 박현이 그리고 둘다섯 이철식과 송골매 이응수가 기타 반주에 맞춰 ‘긴 머리 소녀’를 불렀고, 보령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지우와 심재일은 플루트 연주로 산속 분위기는 완연한 가을로 변했다. 가을볕 따사로운 한나절 동안 칠갑산 자락 정기까지 온몸으로 받으며 힘겨운 세상사 잠시나마 내려놓았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 가을이다.

주간헤럴드코리아, 150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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