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쟁이 아버지의 잘못을 비는 무남독녀 외동딸의 선행

보안면(保安面) 상입석리(上立石里)의 뒤 솔밭 길가에 높이 2.7m 쯤 되는 선돌이 서 있어 욕심 많은 사람을 징계하는 교훈적인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무렵에 이 입석리에서 동쪽으로 4km 쯤 되는 장자터 마을에 욕심 많고 인색한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나 나쁜 짓만 많이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름하게 생긴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는 염불을 하니 욕심꾸러기 그 부자 영감이 중의 바랑(발낭)속에 두엄(썩은 퇴비)을 가득 넣어 주었다.

고맙다고 염불을 외우며 돌아가는 중을 보고 마음씨가 착한 이집 며느리가 쌀 한 말을 퍼가지고 시아버지 몰래 뒤쫓아가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사과하니 중이 말하기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절대로 뒤도 돌아보지 말 것이며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십리 쯤 따라가다가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자기 집이 물바다가 되어 큰 방죽으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재앙에 넋이 나간 며느리는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하는 말이 

"아까운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베짜는 허리띠가 아까와 못 견디겠네" 하고 혼자 씨부렁거렸더니 중이 듣고 

"이 여자도 생명보다 물질을 더 좋아하는 욕심쟁이로구나" 하고 그 자리에서 있는 돌기둥인 선돌(입석)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며느리 뒤를 따라오던 개도 돌로 만들어버려 선돌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지금도 '개바위'가 남아 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이 애닯은 사연의 선돌에 영험이 있다 하여 아이를 못낳는 여인들이 기자(祈子)를 비는 치성을 드리고 있으며 그 욕심쟁이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터 마을 옆에는 지금도 장자못이라는 방죽이 있다.

부안읍성(扶安邑城)의 남문밖에 있는 방죽이라 하여 속칭 '남밖의 방죽'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부안읍내 공용터미널 남쪽 앞의 논들이 20여년 전만 하여도 이 남밖의 방죽이었다. 

옛날에 이 방죽 주변에 큰 부자가 살아서 이 마을을 '장자골'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이 장자골에 장씨라는 큰 부자가 살면서 횡포가 심하고 욕심이 많아 이웃을 귀찮게 하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의 중이 한사람 찾아와서 대문밖에서 시주를 청하는 목탁을 두두리는 것이였다. 욕심이 많고 심술궂기로 유명한 장씨가 보리 한 톨 시주 할 리 있는가. 머슴을 시켜 사정없이 쫓아버렸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아버지 몰래 쌀 한 말과 명주베 한 필을 가지고 뒷문으로 쫓아나가 그 거지중에게 주면서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빌었다.

중이 그 딸을 보더니 난처한 듯 망설이다가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면 집안에 큰 재앙이 미칠 것이니 나를 따라 오시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 것이며 집 생각도 부모생각도 하면 안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딸은 거지중을 따라 안쟁가리 입구 채씨(蔡氏)들 선산옆 언덕에까지 왔는데, 자꾸만 집이 있는 뒤를 돌아보고 싶어서 중의 말도 잊은 채 뒤를 돌아 보았더니, 그 크고 웅장한 자기 집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가 큰 방죽이 되어버렸으며, 자기 옆에는 큰 돌부처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딸은 눈물을 흘리며 중을 따라가 보살이 되고 돌부처가 서 있던 그곳을 '부치댕이'라 부르고 있다.

이 방죽의 한 가운데에 버드나무 한 그루 있는데 그 옆이 시퍼렇게 깊어 그 버드나무 밑에 쌍귀가 달린 큰 구렁이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렁이가 장자골 장씨가 죽은 화신인데 머리에 금(金)복지개를 쓰고 있으며 사람이 그 버드나무 근처를 얼씬만 하여도 쫓아 나와 달려들어서 아무도 그 옆에 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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