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선화공주 무덤 맞을까…익산 쌍릉 100년만에 발굴

전북 익산에 나란히 조성된 백제 고분인 쌍릉(雙陵)에는 과연 누가 묻혔을까.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향가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무덤의 주인일까.

피장자를 놓고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익산 쌍릉(사적 제87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조사가 첫 발굴 100년만에 다시 이뤄진다.

익산시는 21일 오후 대왕릉 앞에서 안전한 발굴을 기원하는 고유제를 지낸 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25일부터 대왕릉 정밀발굴조사에 착수한다.

대왕릉은 지름 30m, 높이 5m의 원형 봉토분으로 백제 30대 무왕 묘로 여겨왔다.

대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이치에 의해 발굴된 횡혈식 석실규모와 금송제 목관에 비춰 충남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 왕릉에 비교되는 무덤으로 인정돼왔다.

쌍릉 피장자에 관한 통설은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를 추진한 무왕(재위 600∼641)과 그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 세종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는 쌍릉이 무강왕(武康王)과 비(妃)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쌍릉 중 대왕묘는 무왕, 소왕묘는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립전주박물관은 2016년 1월 '익산쌍릉 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서'에 대왕릉에서 출토된 치아가 여성의 것이고, 토기도 신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일각에서 대왕릉의 피장자가 무왕이 아닌 무왕의 아내인 신라 선화공주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 발굴조사는 쌍릉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통해 정확한 피장자 등을 밝히기 위한 1단계 사업이다.

익산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지하물리탐사를 비롯한 과학적인 조사를 한 후 정밀조사에 들어간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대왕릉 모습을 지형 복원하고 발굴고분 정밀실측 등을 통해 봉분 축조방법과 석실규모 및 형태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둘 예정이다.

시 역사문화재과 관계자는 "100년만의 발굴을 통해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쌍릉과 백제왕도 익산은 물론 고대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백제 30대 무왕의 원래 이름은 장이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기간이 왕권의 안정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왕권의 안정은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의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빈번한 침공은 백제군의 낙동강방면으로의 진출을 가져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켜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대의 백제는 국제문제에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지킬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양대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 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강화된 왕권의 표징이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宮)을 중수하였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는데, 그 모습은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하였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을 보았다. 왕흥사는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그 이름에서도 암시되지만, 왕이 건립을 주도하였고 몸소 불공을 드리는 곳이어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귀족내부의 분쟁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한다.)라는 지명과 함께 전하는, 무왕과 그 신하들이 그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나아가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를 같은 익산에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은 익산천도를 통하여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한 것이다.

비록, 익산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은 무왕 때에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개혁을 통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와 미륵사의 창건과 같은 대규모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과 흔히들 관련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설화와 무왕대의 미륵사창건연기설화 외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지역의 담로장(?魯長)으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군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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