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잠재웠던 훌륭한 장수"

조선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되었다.

이시애는 원래 함길도 길주의 지방토착 세력으로 세조 치하에 토호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강한 반발심을 품게 되어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기 전 함길도 전역에 흉흉한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어지럽혔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며 난을 일으켰다. 초반에 이시애의 난은 굉장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수많은 고을 수령들이 피살되었고 왕을 신뢰하지 않았던 백성들은 이시애의 휘하에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조는 이 난을 잠재우기 위해 의외의 인물을 중용했는데, 그 인물이 스물여섯의 조카 구성군과 남이장군이었다. 구성군과 남이장군은 이시애의 난을 멋지게 해결해 조정의 중요 인물로 전면에 설수 있게 되었고, 세조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인사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큰 공을 세운 스물여섯의 구성군을 영의정에, 역시 젊은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이다.

조정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세조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한명회나 신숙주와 같은 구공신들은 이미 너무나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공을 세운 젊은 신진들의 힘을 함께 키워주기 위한 세조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세조가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악화된 세조의 건강 때문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을 예종이 권력의 균형을 갖춘 세력을 이끌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조는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하고 얼마 있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세조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던 구성군과 남이장군 중 구성군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조정신료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남이장군은 나서기를 좋아하고 겸손하지 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구공신들을 무시하고 뻣뻣하게 구는 남이장군을 조정신료들이 곱게 봐주기 만무했다. 남이장군을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장군에 대한 신료들의 상소가 빗발쳐, 예종은 즉위한 당일 바로 남이장군을 좌천시켰다.

이에 남이는 자신을 좌천시킨 조정 신료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고 역시 자신처럼 세조 시절 총애를 받았던 유자광을 찾아가 그의 심정에 대해 토로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남이를 만나고 난 뒤 바로 대궐로 들어가 남이 장군이 역심을 품었다고 고변을 했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심을 고변하는 자리에서 남이가 쓴 시를 바꿔치기 하여 '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라는 시구절로 예종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남이 장군은 결국 역적의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다. 실록에 기록된 대로 그가 정말로 역심을 품어 반란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은 젊은 나이에 큰 칼을 휘두르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잠재웠던 훌륭한 장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 세조대에 용의 아들들이 역모를 꾀했는데, 두 아들의 이름은 아룡과 좌룡이었다. 용의 아들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값만 믿고 이 두 아들들은 영양고을 백성들을 벌벌 떨게 할 만큼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다. 고을원님이 이 아룡과 좌룡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이들은 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하여 도대체 잡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다. 

고을에서 보낸 군사들이 아룡과 좌룡에게 백전백패하자 이 두 아들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스스로 왕이 되겠노라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했으나 아룡과 좌룡은 기세를 꺾지 않았고 백성들은 그저 불안에 떨기만 할 뿐이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군사의 선봉장은 남이장군이 맡았다. 남이장군의 군사는 영양군 입암면 신사리에 어느덧 당도했다.

"네 이놈, 남이야. 나 아룡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장군 이니라. 곧 왕이 될 터이니 내 앞에 와 무릎을 꿇는다면 높은 벼슬자리 하나 내어 줄테니 항복해라.""그 입 다물어라. 이놈아!"
남이장군의 호통소리가 영양고을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네 놈이 정녕 명을 재촉하는구나."
아룡과 좌룡은 비웃음을 입가에 가득 흘리며 하늘 높이 용솟음쳐 솟아올랐다. "두 놈 다 상대해주마. 한꺼번에 다 덤벼라."

남이장군 역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땅 아래 군사들과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세 장수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간간이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와 불꽃만 번쩍일 뿐이었다. 한참동안의 접전 끝에 아룡의 목이 지상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좌룡은 겁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남이장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좌룡의 목도 함께 베었다.

남이장군은 승리를 자축하며 선바위 절벽에 자신의 얼굴을 칼로 새겼다고 한다. 남이장군과 아룡, 좌룡의 불꽃 튀는 접전은 남이장군의 승리로 돌아갔고 비로소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영양고을에 남이장군이 싸웠던 격전지인 선바위일대를 남이장군의 이름을 본 따 남이포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남이장군은 젊은 나이에 신중하지 못한 판단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남이장군의 용맹함과 나라를 위한 충절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남이장군의 발자취가 머무는 모든 곳은 남이장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전설이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무수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제법 음악분수도 나오고 수려한 경관을 보러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 되었지만 조금만 더 과거의 이야기로 귀를 기울여본다면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가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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