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인, 제20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

어느 날 갑자기 아내에게 치매가 왔다. 시인에게는 청천벽력이요 세상의 중심축이 바뀌는 큰 충격이었다. 믿기 어려웠던 시인은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고 했다. 매화에 이르는 길, 무념무상,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거라고 단어의 뜻을 바꾸고 아내를 바라보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시인에게 가장 소중한 건 아내뿐이다. 서로 다른 반쪽끼리 만나 하나가 되어 살아온 지 어언 45년, 함께 나누었던 희로애락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아내가 없는 시인의 삶은 생각조차 못 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뭐라 하면 알아듣는 것인지 / 눈을 끔벅끔벅 깜박이다 감아 버립니다 // 나를 원망하는 것인지 / 내가 불쌍하다, 한심하다는 것인지 // 종일 말 한마디 없는 / 아내의 나라는 대낮에도 한밤중입니다 // 말의 끝 어디쯤인가 / 달도 오르지 않고 별도 반짝이지 않는 // 그곳을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인가 / 오늘도 아내는 말 없는 말로 내게 속삭입니다’ 이번 9월 초에도 치매를 앓는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 「침묵의 나라 -치매행致梅行 · 281」 전문이다.

 

홍해리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출신으로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 후,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자리를 잡았다. 1969년 시집 『투망도』로 등단했으며, 지난해에 펴낸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라는 제19 시집이며, 『매화에 이르는 길』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며 기록으로 남기며 쓴 제18 시집 『치매행』의 제2부 형식이고, 노 시인의 스무 번째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이 나오기도 전부터 시인은 전국의 치매 환자 요양시설의 주소까지 파악했단다. 임채우 시인은 “ 시인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혈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 그 어떠한 시보다도 진실하고 감동적이며 깊이가 있는 절창입니다.”라고 발문에서 밝혔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은 이 땅의 치매 환자 80여만 명을 돌보는 가족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벌써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린다. 1986년 우이동 인근에 살던 홍해리 시인을 비롯한 이생진, 채희문, 임보 시인 등이 ‘생명과 자연과 시’로 의기투합해 <우이동 시인들>이란 동인회를 결성했다. 시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시낭송회와 월간 문예지도 만들었다. 헤밍웨이처럼 하얀 수염을 멋지게 다듬어 기르는 홍해리 시인은 청바지를 즐겨 입는 만년 열혈청년이다. 1987년부터 30년 이상을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참여하고 이끄는 리더이다.

 

<우이시낭송회>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3시에 도봉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 이번 9월 시낭송회가 351회째이다. 마지막 토요일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30일이라서 9월 23일로 어쩔 수 없이 한 주 앞당겼단다. 지난 8월말에는 ‘2017 우리詩여름시인학교’를 충북 제천시 청풍면 청풍유스호스텔에서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시와 시인을 만나다’라는 표어 아래 1박 2일 동안 전국 각처에서 모인 시인과 독자들 120여 명이 시 창작 강의, 시 낭송, 노래와 장기자랑, 우리詩바자회, 우리詩백일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만족도를 한층 더 높였다.

 

‘너의 고향은 하늘이었느냐 / 어쩌다 지상으로 추락하여 / 잃어버린 날개로 날아오르며 / 그리움의 향기로 꽃을 피우느냐 / 해오라비난초 잠자리난초 나비난초 / 제비난초 갈매기난초 방울방울 방울새란 / 병아리난초 나나벌이난초 새우난초 / 닭의 난초여 닭의 난초여 아름다운 네 모습 / 저 무한천공에서 우주와 영혼을 노래하고 / 영원을 향해 날아올라라’

 

박이제 작곡, 소프라노 고선애가 불러 널리 알려진 가곡 「저 무한천공으로」 한 대목이다. 일흔다섯 노 시인의 지고지순한 순애보, 애절한 사랑 노래는 가을 하늘처럼 높고 또 맑아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들며 울린다. 이번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에 실렸던 230번 이후에도 치매행은 계속 진행 중이다. 노 시인의 간절한 희망은 아내가 치매에서 벗어나는 것, 오늘도 마른 눈물을 찍어 또 한 편의 시로 지은 치매행 282번을 날려 보냈다,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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