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대로 한가득 고추를 담아 또 둘러메고 파란 대문을 밀치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뭐가 못마땅하신지 양미간엔 내 천(川)자가 깊게 파였다. 훑어오신 고추를 툇마루에 덜~퍽 쏟고는 뒤돌아서려는 그 찰나, 어머닌 찌그러진 양재기를 휘휘 휘저으며 노랑나비처럼 미끄러지듯 날렵하게 부엌에서 나오신다. 양재기 겉이 뽀얗게 된 걸 보니 얼음에 당원 탄 미숫가루가 분명하다. 이녁 맘은 내가 젤 잘 알지요, 화 풀고 잊어버려요. 일주일 새에 그런 병이 올 줄이야, 하늘이 무심했다. 봄부터 가꾼 고추인데, 때아닌 탄저병이 돌아 농사를 망쳤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대풍년이었는데, 하루걸러 한 번씩 온 가을비 탓에 탱탱한 고추들이 시름시름 시들어 버렸다. 약을 칠 겨를도 없었다.

“맵지 않으셔요?”
점심때가 한참이나 지난 지라 어머니는 급히 밥상을 챙겼고, 여동생은 주섬주섬 큼직한 풋고추를 골라 씻어 한 움큼 손에 들고 왔다. 칠이 벗겨져 너덜너덜해진 오래된 호마이카상 가운데에 올려진 고추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잔뜩 부풀었다. 단단히 약이 오른 게 분명하다. 물기까지 머금고 윤기가 번지르르한 게 겉보기에도 무척 매울 게 뻔하다. 그런데도 어머닌 그 풋고추를 덥석 집어 꼭지를 뗀 후, 밥 한 숟갈을 넣으시더니 뻘건 고추장을 푹 찍어 아삭 깨무셨다. 어머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콧방울까지 실룩거리며 맛나게 잡수신다.

“요새 거는 고추도 아니다.”
하나도 안 맵다 하시며 나머지 공깃밥을 거뜬하게 비우신다. 못 믿겠다. 물론 살이 제법 통통하고 맵지 않은 풋내 나는 아삭이고추는 먹어본 경험은 있다. 큰 것보다는 조금 작은 거로 골라 고추장이 아닌 된장을 묻혀 깨물었다. 순간 전해오는 매운맛이란 금세 이마와 목덜미의 땀샘이란 땀샘은 모조리 개방시켰다. 맨밥을 몇 숟갈 떠 넣고 물을 들이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고통으로 펄펄 뛰며 간식으로 사 두었던 커다란 식빵의 속살까지 뜯어먹고 우유를 마셔 봐도 가라앉질 않는다. 매운맛은 쓰린 맛으로 변했다. 채 여물지도 않은 풋고추가 이렇게 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봤지? 천하에 믿을 게 못 되는 게 고추다”
어머니는 시집 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여동생과 마주 앉아 일장훈계를 늘어놓으신다. 여하튼 거기가 네 집인 겨, 그곳 귀신이란 말이여, 시집살이라는 게 고초당초보다 맵다지만 한고비 두 고비 넘기다 보면 금방 네 세상이 와, 꾹꾹 눌러 참아야지, 신랑 단속 단디 해야 한다, 내 말 뭔 뜻인지 말 안 해도 알겠지, 하시면서 수백 번이나 말끝마다 물음표 써가며 신신당부, 반복해서 훈계하신다. 여동생은 그런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며, 연신 뜨끈한 떡가래처럼 고개를 주억거린다. 두 볼이 볼그스레하니 달아오른 걸 보면 내 생각엔 그냥 겉으로만 장단 맞추는 체하는 게 분명했다. 뭔 소린들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매운 식사를 간신히 마치고, 가을 하늘 우러러보니 참 맑고 곱기도 하다. 구름 몇 점 떠가니 더욱 운치가 있다. 요즘 어디가 야(野)고 어디가 여(與)인지 헷갈린다. 아기들 기저귀와 정치꾼은 자주 갈아줘야 한단다. 너무 오래도록 눌러 앉히면 짓무른단다. 궁뎅이에 묻은 게 똥인지 된장이 몰라서 오두방정 떨면 이미 끝장난 거란다. 자리에 앉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 총리를 국회의원들이 밥상머리로 초대했었다. 탄·저병 걸려 시들시들한 고추만도 못한 그들이 되레 오독오독 씹혔다. 역시 고추는 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 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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