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주에서 인천으로… 고려때 12명의 왕비 배출한 ‘어진 마을’

지난 2013년은 인천시 정명 6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인천(仁川)이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태종때인 1413년이다. 태종은 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고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개편과 지역명 바꾸기를 실시했다. 그래서 산이나 천이라는 명칭을 쓰도록 했다. 인주(仁州)가 인천으로 바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내용에 실려있다.

‘ 각 도의 단부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군현(郡縣)의 이름가운데 주(州)가 있는 것은 모두 산(山), 천(川)으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인천 이전의 지명인 인주(仁州)는 ‘어진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곳 인주 이씨 집안에서 고려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를 비롯해 모두 7대에 걸쳐 12명의 왕비가 나왔기 때문에 조정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인주라고 불리기 전에는 ‘경원군(慶源郡)’이라 불렸다. ‘경사의 근원’이란 뜻이다. 이 역시 왕비들의 고향이기에 붙여졌다. 고려 중기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바로 인주 이씨였으며 당시 딸 세 명을 왕비로 보낼만큼 실세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지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주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미추홀이라고도 함)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소성(卲城)이라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 9년에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소속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황비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므로 올려 경원군으로 삼았다. 인종때 황비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공양왕 2년에 올려 경원부(慶源府)로 삼았다’

이같은 기록을 볼 때 인천의 지명은 미추홀(매소홀)→소성→경원군→인주→경원부→인주→ 인천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인천은 예전에 크게 4곳으로 구성된 도시다. 개항장 일대 인천과 부평, 강화, 교동이다. 한때는 부평, 강화, 교동이 인천보다 컸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일본은 인천을 대폭 축소시킨다. 당시 개항장 일대(지금의 신포동 북성동과 동인천 인근)만을 인천으로 하고 인천의 나머지와 부평을 새로 만든 부천에 편입시킨다. 그래서 부천군청이 한때 문학동에 있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인천이 확대되면서 다시 인천의 모습을 찾아간다. 부평이 인천시에 소속되고 1995년 경기도 강화군이 인천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부평과 강화는 아직도 인천에 속하길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다. 일부 부평사람들은 아직도 인천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부평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천은 광복후 잠시 제물포시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8월15일 지방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인천부는 시(市)로 개칭되고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했다. 1989년 김포군 계양면,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등이 편입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같은해 3월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을 통합해 전국 제일의 광역시가 되었다. 인천은 지난해 300만도시 인천을 맞았다. 다른 시도가 모두 인구가 줄어가는 데 인천만이 인구가 늘고 있는 것이다. 도시가 성장해 간다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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