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 밑에서 병든 남편과 또 한사람을 섬기는 열녀의 恨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병든 남편을 이끌고 젊은 여인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반겨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나 이 집 저 집 동냥을 하면서 새 고을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기대를 가져 보는 것이었다. 

용산을 지나 그들 부부는 마침내 솔티재(松峙)를 넘어섰다. 해가 지기 전에 젊은 여인은 남편을 부축하여 어느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부잣집 주인은 마침 아내를 잃은 지 얼마 아니 되어 장가를 들지 않고 혼자 사는 홀아비였다. 홀아비 주인은 마음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주인은 여인의 병든 남편에게 약을 구해 주었다. 여인은 주인의 착한 마음에 고맙기도 하려니와 남편의 병시중을 들면서 남은 시간을 안주인이 없는 큰 집안 살림살이를 보살펴 주며 시간을 보내었다. 

주인이 여인을 바라보는 눈에는 차츰 애정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기집안 살림을 마치 안주인처럼 도맡아 해주는 여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서 애정으로 바뀌어간 것인지도 몰랐다. 

주인은 얼마간의 한약 짓는 법도 아는 사람이어서 젊은 여인의 남편에 대한 약을 이것저것 바꾸어 먹이곤 하였다. 그러나 워낙 환자의 병세가 심해서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주인은 속으로 젊은 부인의 불행한 인생을 동정하기 시작했다.젊은 여인이 홀아비 부잣집의 구석방을 얻어 산다는 소문은 이튿날 온 마을에 퍼졌다. 소문이란 참으로 빨랐다. "마을에 열녀가 한 사람 들어왔다" 는 소문은 마을 사람들의 자랑은 될지언정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 아내가 병든 남편을 마다하지 않고 이 집 저 집 동냥을 하며 떠돌아다니는데 모두 감동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느 사이에 젊은 여인을 영동열녀라 부르기 시작되었다. 열녀의 하루 일은 주인 집 마당을 쓸어 주는 데서 시작하였다. 

된서리를 맞아 울안의 감나무 잎이 마당으로 하나 가득 떨어져 있는 것을 영동열녀는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모두 쓸었다. 마당과 뜨락을 쓸고 나면 열녀는 부엌일을 시작했다. 계집종과 하인들을 부리면서 열녀는 마치 그 집의 마님처럼 일을 알뜰하게 해 나갔다. 

주인은 "주제넘은 청인 줄 아나 그대 남편의 병이 나을 때까지 약을 대어 줄 터이니까 나하고 함께 살자"고 했다. 말하자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남편 시중을 끝까지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와 부부의 인연을 맺자는 청이었다. 

열녀는 이 중대한 주인의 부탁을 받고 망설이었다. 어차피 남편은 회복할 수 없다. 원이라면 남편의 바람대로 좋은 약이나 마음껏 써 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주인은 그 약을 끝까지 대어준다지 않는가 고맙기로 말하면 이보다 고마울 때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열녀는 그날 밤에 이 문제를 남편과 의논을 하였다. 남편도 자기의 목숨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반대할까 보냐 먹고 싶은 약이나 실컷 먹어보고 죽으리라 했다. 열녀는 남편의 동의를 얻은 다음 주인에게 달려갔다. 

그날부터 한 지붕 밑에서 한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기는 색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주인 홀아비는 병자의 아내인 예쁜 여자를 아니 이제는 자기의 아내도 되는 영동열녀를 끔찍이 아끼며 사랑하였다. 동거생활에 들어가지 전에 약속처럼 병자에게 매일같이 좋은 약이 공급되었다. 

낮에는 주로 병든 남편의 시중을 들었고 밤이 되면 안채에서 현재의 남편인 주인을 섬기는 영동열녀는 슬픔과 기쁨을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한약에 많은 지식을 가진 현재의 남편이 제 아무리 좋은 약으로 병든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주었어도 그녀는 병든 남편을 대할 때마다 눈물이 솟았다. 

두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열녀는 자기와 같은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자가 이 세상에 자기 한 사람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본 남편의 증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후 본 남편은 열녀의 지극한 간호와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현재의 남편은 열녀를 아내로 둔 입장에서 아내의 마음을 끌기 위해 예를 갖추고 많은 돈을 들여서 본 남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 주기로 하였다. 

마침내 본 남편의 상여가 부잣집 구석방을 떠났으며 얼마 후 상여가 묻힐 장소에 닫자 산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은 미리 파놓고 기다리고 있던 구덩이에 열녀의 죽은 남편의 관을 묻었다. 

죽은 남편을 묻은 바로 옆에는 장차 열녀가 묻힐 구덩이를 하나 더 팼다. 열녀는 현재의 남편에게 "장차 제가 묻힐 구덩이가 내 키에 맞나 들어가 재어 봐야겠다" 고 말하면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반듯하게 누웠다. 그런데 한번 구덩이에 들어가 누운 열녀는 좀처럼 일어나려 들지를 않았다. 그 때 열녀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독약을 입에 넣고 숨이 끊어진 뒤였다. 

열녀는 결국 현재의 남편을 이 세상에 버려 두고 본 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다 죽은 열녀를 두고"열녀이면서 열녀가 아닌 열녀"라 하면서 자주 입에 올랐다. 

본 남편을 위해 산목숨을 끊은 것은 열녀이지만 현재의 남편을 그냥 두고 죽어간 것은 열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열녀를 두고 열 부열(烈不烈)의 여인이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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