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마는 네굽을 모아 구르며 갈기를 세우고 주인을 붙잡아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와 그 남편 전창군 유정량의 묘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
 
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에 봉해졌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가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이 보기에 지나치고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까지 번졌다. 화가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께서 부마를 불러 들였다.
 
유정량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 차림새가 버릇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인다운 데가 있어 선조께서 손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으로서 유배를 면키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조가 "귀양길을 떠날 자라면 짚신 한 죽이면 족하지 두죽은 다 무엇에 쓸 것인고?"라고 묻자 유정량은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옹주와 함께 떠나려 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조는 더 이상 나무라지 아니했다.
 
한편 유정량의 할아버지인 유영경은 소북파의 우두머리로서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에게 모함당하여 함경도 경흥에서 죽게된다.
 
유정량도 16세의 어린 나이에 전라도 고부로 유배당한다. 귀양생활 7년째 되는 어느날 경상도 양산으로 다시 옮겨 가는데 도중에 집은 다헐고 거미줄이 곳곳에 늘어져 있는 주인없는 빈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달려와서 빨리 나오라고 야단 법석을 떨었다. 전에도 여러 길손이 이 집에서 자게 되면 사람이 온데간데 없이 귀신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정량은 말대꾸도 하기 싫은 듯 다리를 쭉 펴고 누었다. 조금후에 방안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며 천장에서 큰 구렁이가 뚝 떨어 지면서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튿날 날이 새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길손은 간데없고 방안에 큰 구렁이만 죽어 있었다. 유정량은 이미 양산에 도착해 있었다.
 
 유정량에게는 표동이라 불리우는 애마가 있었는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그런데 어느날 표동이 유정량을 찾아왔다. 광해군이 표동을 끌고가려 하자 마굿간에서 뛰어나와 이곳 양산 6백리길을 단숨에 달려 온 것이다.
 
귀양살이 12년되던 해 어느날 표동이 별안간 네굽을 모아 구르며 갈기를 세우고 날뛰자 유정량이 이를 달랬으나 저녁에 겨우 그쳤다. 이날이 바로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3월 12일 이었는데 이튿날 아침 역졸이 궁으로 돌아 오라는 어명을 가지고 달려왔다. 이때부터 표동은 영마라 하여 더욱 이름났으며 그후 40여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후히 장사지내고 그 무덤을 용마총이라 이름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정휘옹주는 남편이 유배생활을 하는동안 홀로 되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다 효종 4년(1653)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한번도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자라서 벼슬에 올랐을 때에는 백성들을 부모형제 대하듯 하였으며 성품이 곧고 청렴결백하여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가 귀성도호사로 있을 때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벼슬을 버린채 고향에 돌아와 정성껏 병 간호에만 열중 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고 의원들도 무슨병인지 아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여러날을 병간호로 지샌탓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산신령이 나타났다.
 
"네 아비의 병은 산삼과 석밀(벌이 산속의 나무와 돌속에 모아둔 꿀)을 복용하면 나을 터인즉 너는 어찌하여 게으름을 피우며 자고 있느냐"
 
오백주는 정과 망치를 준비하고 길을 나섰으나 겨울철에 꿀을 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내일 다시 찾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이곳 축석령을 넘게 됐다. 고개 마루턱을 거의다 올랐을 때 앞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으르렁! 으르렁! 거리며 금새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내 비록 효성이 부족하여 석밀을 구하지 못하고 죽게됐다. 나 죽는 건 서럽지 아니하나 병환에 계신 우리 아버님은 누가 돌본단 말이냐. 부디 바라건데 석밀을 구한 후에 나를 잡아 먹어라"
 
오백주는 호랑이 앞에 통곡하며 애원했다. 얼마동안 엎드려 애원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큰 바위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꿀 냄새가 진동하고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백주는 크게 기뻐하며 정으로 바위를 쪼개서 석밀을 정성껏 채취한 다음 산삼과 함께 복용시키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한 오백주에게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 하여 이 바위를 범 바위라고 이름했다. 그후 오백주는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만수무강을 축원드렸다고 해서 고개 이름이 "축석령'이 됐다고 전해온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