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에 닭의 알을 묻으면 닭이 홰를 치며 울만큼 영험하다는 것

장준은 팽성읍 석근리에 살았었는데 서기 1748년 영조 24년에 출생하였고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 때는 부친이 독사에 물렸을 때에 그곳에 가서 풀섶을 뒤져 독사를 찾아내어 머리를 깨물어 죽이는 한편, 상처를 입으로 빨아 독기를 빼내고 독사의 쓸개를 꺼내어 환부에 발라 치유시켰으며 서기 1794년 겨울에 모친이 병으로 누워있었는데 백약이 무효이고 붕어를 달여 먹여야한다고 하므로 웅덩이를 찾아가 얼음판 위에서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난 뒤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바가지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얼음 구멍이 생기더니 큰 붕어 한 마리가 얼음판 위로 뛰어나와 얻게 되었으니 하느님이나 신이 뜻이 아니고는 인력으로 어찌 이루어진단 말인가 하고 이것을 달여서 모친께 드리니 병환이 완쾌하였다.
 
4년 뒤 부친이 병을 얻어 약을 구하매 의원이 말하기를 뱀을 구해서 술을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때가 엄동설한이라 장준은 산에 올라가 꿇어 앉아 8시간 동안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더니 기적적으로 뱀을 얻게 되어 부친의 병환이 완쾌되었다. 얼마 후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씩 6년간 시묘살이를 하나 각계각층에서는 그 효성을 극찬하였고 이를 알고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고덕면 여염리 성머리 마을 앞에는 삼성산이라고도 하고 투구봉이라고도 부르는 자그마한 산이 
지금은 매일유업시범목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흔적도 희미한 이 산에는 이괄의 아버지 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괄은 조선 인조 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옛부터 이 마을에는 이괄의 아버지 묘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이괄은 어려서 고덕면 율포리 방개울이라는 마을의 이진사 댁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로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이괄은 성실성과 충직함으로 이진사의 귀여움과 신뢰를 얻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이진사의 방문 앞을 지나다가, 이진사가 지관과 은밀히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내용인즉 성머리 앞산에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 곳에 닭의 알을 묻으면 닭이 홰를 치며 울만큼 영험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괄은 이진사가 길을 나서기 전에 얼른 삶은 계란을 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나서기 전 이진사는 이괄에게 계란을 준비하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이괄은 재빨리 삶은 계란을 준비하고는 이진사가 계란을 묻으라고 하는 곳에 삶은 계란을 묻었다. 날계란을 묻을 곳에 삶은 계란을 묻었으니 닭 울음소리가 날리 만무하였다. 이렇게 이진사 일행을 따돌리고는, 밤에 몰래 날계란을 준비해서는 명당자리에 가서 실험을 해 봤다. 그랬더니 정말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곳이 명당임을 확신한 이괄은 나중에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되었으며,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한다.
 
서탄면 회화리 하단부 하천에 색시구비란 웅덩이가 있다. 현재는 제방이 축조되고 하천정비가 되어있어 그 흔적은 없어졌으나 10 여 년 전만 해도 냇물의 깊이가 장정의 길반(2.5m) 정도 깊었으며 내 곁에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는 아무리 한발이 계속되어도 물이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이 냉기가 있어 삼복더위에도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찼다. 15년 전만 해도 나룻배가 있어 오가는 길손을 건너 주었다고 한다.

색시구비란 전설은 옛날 조혼하던 시절 9살의 신랑에게 16살의 처녀가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신방을 꾸민 첫날밤 9살의 신랑이 오줌을 싸고 신부가 오줌을 쌌다고 부모에게 고해 바쳤다. 시어머니의 꾸중을 크게 듣고 억울하고 동리가 창피한 가운데 5일째 새벽에 신랑이 오줌을 또 싸고 새색시가 오줌을 쌌다고 부모에게 고해 바쳤다.

시부모는 새색시가 야뇨증이 있는 환자로 단정하고 내일 친정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새색시는 억울하다고 시부모에게 신랑이 오줌을 쌌다고 변명하였으나 새색시의 억울함은 시부모에게 반영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랑이 오줌을 쌌다고 하면 자식이 바보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부는 죽음으로 결백을 보여주리라 생각하고 새벽 새색시구비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이후 매년 색시구비웅덩이나 냇물에서 8, 9세의 어린아이들이 익사하여 주민들은 새색시의 원혼이 잡아갔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며 익사자가 있을 때마다 전설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평택시 도일동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조선시대 장군인 원균(1540~1597)과 연관되어 내려오며, 실제로 원균의 묘 봉분 아래 동편으로 자리 잡은 말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 원균은 경상우수사, 충청병사, 경상도 통제사 등을 지내고 정유재란 시 칠천도 해전에서 전사했다.

전설에 등장하는 애마는 그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말로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선조가 1596년 7월 9일 충청병사에서 전라좌도 병마절도사로 전임한 원균에게 하교하기를 “경이 국가를 위해 전력하는 충성은 고금에 그 예를 비길 데가 없어 내가 일찍이 이를 가상하게 여기었으나 아직 그 보답을 못하였던 터라 이제 그대를 멀리 떠나보내면서 친히 전송하고자 하였으나 몸이 불편하여 뜻대로 못하노라”하며 특별히 궁중에서 타던 명마(名馬) 한 필을 내어 주었다.
 
원균은 이에 감복하고 이 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애틋하였다고 하는데, 애마총 전설은 왕에게 하사 받은 명마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말, 적의 재침이 예견되자 조정은 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은 전라·충청도 통제사로 원균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정유년 7월 16일 수군 진영을 공격한 적의 대군으로 인해 후퇴와 혼란을 거듭하다가 아군은 칠천도로 물러났으며, 육지에 상륙한 원균은 적군에게 공격당해 전사했다.

그 때 병영에 있던 애마가 원균의 전사를 느낌으로 알아채고, 그가 신었던 신발과 담뱃대를 입에 물고 천리길을 달려 도일리에 있던 그의 생가에 도착해 크게 울면서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졌다. 이에 그의 집에서는 장군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고 영특한 말을 고이 안장해 그 넋을 달래게 됐다.
 
그 후 말이 죽은 자리를 ‘울음밭’이라 했고, 말이 묻힌 무덤을 ‘애마총’이라고 불렀다.

애마총은 원균 장군 묘역이 조성될 때 묘의 아래쪽에 무덤을 새로 만들어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반면 울음밭은 현재 도일리마을회관 근처에 비석만 덜렁하니 있을 뿐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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