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유람노정 따라 천하명승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높이 구가

시인 정철(1536-1593)을  이야기 할 때면 그가 창작한 관동별곡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천하명승 금강산을 우리말로 격조높이 자랑한 시가를 창작한 정철은 서울의 양반집안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계함이며 송강은 그의 호이다. 그가 9살 되던 해에 을사사화(1545년)에 의하여 맏형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죽고 아버지마저 귀양살이를 하게 되어 정철은 부득이 하던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6살 나던 해에야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온 정철의 아버지는 자기 부모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를 따라간 정철에게 있어서 창평 에서의 생활은 창작수업의 좋은 계기로 되었다. 그는 여기서 농민들의 인정세태도 알게 되고 그들의 소박한 말도 배우게 되었다.

정철은 또한 창평 에서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들인 하서 김린후, 고봉 기대승 에게서 직접 글을 배웠다. 그들은 벼슬하기를 단념하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전심하던 학자들로서 국문시가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스승들에게서 배운 정철은 일찍부터 국문시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 시기에 정철은 뒷날에 정계와 문단에서 이름을 날린 율곡 이이, 우계 성혼들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그는 26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그때부터 정철은 당파싸움에 휘말려들어 파란 많은 인생행로를 걸었다. 서인당파에 속해있던 그는 반대파에게 몰리어 정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유배살이도 하였다. 정철은 이 과정에 농민들의 생활 처와 인정세태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국문시가 창작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정철은 44살 때(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비교적 당파싸움을 멀리할 수 있었던 이 시기에 그이 시적재능이 비로소 빛을 드러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우수한 조선 문자에 기초하여 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넓은 길이 열려있었다. 하지만 고루한 양반관료들과 문인들은 이른바 정통문학을 내세우면서 우리말과 글로 된 시와 산문들을 속된 글, 비루한 문장이라고 하면서 천대하였다.

그러나 소년시절부터 국문시가에 관심이 높았던 정철은 이러한 양반문인들의 시비곡절을 물리치고 농민들이 알기 쉬운 우리 글로 진보적 내용의 시가작품과 시조들을 많이 썼다. 그의 국문시가 작품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대표작이 바로 관동별곡이다.

기행시 형식으로 된 이 작품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원주에 갔을 때 금강산과 그 부근의 동해안 일대를 구경하고 아름다운 조국의 산천경개에 크게 감동되어 지은 것이다.

관동별곡은 시인의 유람노정을 따라 만폭동으로부터 비로봉을 거쳐 해금강의 총석정, 동해바다의 해돋이에 이르기까지 금강산과 그 일대의 경치를 순차적으로 펼쳐 보이면서 천하명승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자랑높이 구가하였다. 작품은 생동한 시적 형상과 세련된 언어의 솜씨 있는 구사로 마치 금강산의 천하절경을 방금 눈앞에 보는 듯이 그리고 있다.

"백천동 곁에 두고 만폭동 들어가니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초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잦았으니 들을제는 우뢰러니 보니 난 눈이로다"

이것은 만폭동의 장쾌한 정경을 묘사한 관동별곡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정양사의 진헐대에 서서 바라보는 경치에 대해서는
"어화 조화응이 헌사도 헌사할사날거든 뛰지 마나 섰거든 솟지 마나부용을 꽂았난듯 백옥을 묶어난듯"
이라고 노래 불렀으며 금강산 유람노정의 마지막 부분인 총석정의 절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형상하였다.
"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 올라가니백옥루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있구나공수의 솜씨런가, 귀신도끼로 다듬었나구태여 육면은 무엇을 상떴던고"
관동별곡은 금강산의 절승경개를 생동한 필치로 펼쳐 보이면서 아름다운 조국산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과 세계적인 명산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의 민족적 긍지를 금강산의 4대 명폭의 하나인 십이폭포를 노래한 구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불정대 올라서니천길절벽을 반공에 세워두고은하수 한굽이를 촌촌이 베여내여실같이 풀어내여 베같이 걸었으니 도경 열두굽이 내보매는 여럿이라이적선 이제 있어 고쳐 의논하게 되면여산이 여기보다 낫단 말 못하려니" 우리말의 우수성을 잘 살리고 비교, 비유 등의 재치 있는 시적형상으로 형용도 그지없고 태세도 하도 한 금강산을 살아 움직이는 것 과 같이 그려낸 관동별곡은 우리나라 국문시가 발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걸작이었다.

이 작품은 세상에 나오자 우리나라의 자연을 다른 나라의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 나라의 것만 찬미하기가 일쑤이던 고루한 양반사대부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당대는 물론 후세의 뜻있는 문인들은 정철의 관동별곡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의 국문시가작품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16세기말-17세기 초에 활동한 시인 권필이 관동별곡을 노래한 잘 부른 양이일 에게 보낸 시에서"군을 만나 관동별곡 소리를 들으니 만첩 금강 솟은 경을 알 듯도 하구나."
라고 쓴 것 이라든가 금강산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시인 김상헌(1570-1652)이 자기 벗에게"관동별곡은 가장 청신하다."고 한 것은 이 작품이 사람들의 심금을 얼마나 울렸는가를 말해준다.

실학의 선구자인 한사람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은“우리나라 가사문학을 논하면서 정송강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우리나라 노래들 중에서 가장 좋다.“고 평했으며 17세기의 유명한 소설가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정철의 가사들을 베껴 한 책으로 만들어두고 일상적으로 즐겨 읊으면서"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오직 이 세편뿐"이라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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