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룡 출현골은 봉황이 알을 품고 龍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

영산강과 넓은 나주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덕룡산은 호남지역의 중심에 자리하며, 고대에는 창룡산, 임진왜란 이전에는 득룡산, 그 이후는 덕룡산으로 불리며 용과 관련된 산이름이 다양하게 구전되어 왔다.

덕룡산의 창룡 출현골은 용이 출현한다는 곳으로, 풍수지리상 전국 3대 명당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으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미륵의 화신으로서 용과 봉황같은 영웅이 출현할 길지로 여겨왔다.

특히 이곳 사람들은 용의 가피를 입은 임란 이후부터 이 산을 덕룡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무렵이었다. 어느날 유촌마을 노인들과 마을사람들은 꿈에 백발노인이 등장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을을 비워서는 안 된다”는 계시를 받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서로 그 꿈의 신이함을 이야기하며, 백발노인이 많은 마을주민들의 꿈에 동시에 나타난 것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 꿈을 꾼 며칠 후 왜군이 마을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의 모든 마을사람들은 동요하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천리 마을사람들은 백발노인의 계시에 따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을을 떠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드디어 왜군이 철천리 인근에 들어섰을 무렵, 용이 조화를 부린 듯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마을을 덮치는 바람에 철천리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구름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한 상태로 삼일이 흘렀는데, 왜군은 구름에 뒤덮힌 철천리에 마을이 있는지도 모른 채 다른 마을을 거쳐 진격하였고, 철천리는 구름 덕분에 왜군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철천리 사람들은 그 구름이 득룡산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 믿고, 용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산이름을 덕룡산(德龍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편 신라말엽, 왕은 기우는 국운을 걱정하여 지금의 전남 영암군 월출산 기슭에 99칸의 대찰을 세우도록 명했다.
당시 왕궁 이외의 건물은 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국법에 정해져 있어 왕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 채 99칸 대웅보전을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립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서까래를 맡은 목공이 사보라 노인이었다.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하려면 하늘을 차고 나는 듯 치솟은 지붕의 멋을 한껏 살려했는데, 이를 위해 서까래를 가장 잘 다듬는 당대의 뛰어난 대목 사보라 노인에게 일이 맡겨진 것이었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이 불사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젊은 목수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여 개의 서까래를 깎고 다듬었다.
그런데 상량을 며칠 앞두고 낱낱이 자로 재면서 깎은 서까래가 계획보다 짧게 끊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재고 또 재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노인은 절망하였고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며칠을 침식을 끊고 사람을 멀리하는 노인을 보고 이를 걱정하던 며느리가 간곡히 그 까닭을 묻자 노인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를 들은 며느리 역시 무거운 근심 속에 잠길 뿐 대책이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상량을 사흘 앞두고 공사를 맡은 벼슬아치들이 영문도 모르고 사보라 노인의 병문안을 왔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벼슬아치들을 전송하던 그때 며느리의 눈에 한 줄의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며느리는 문득 깨달아 노인에게 달려가 짧은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웅장하고 튼튼할 것이라 고했다.

 이에 노인은 생기를 되찾아 공사현장으로 달려가 마치 춤을 추는 듯 날렵하게 기둥과 기둥, 대들보에서 처마 끝을 재고 부연을 켜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찰을 완성하였으며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부연을 단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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