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내딸 혜용이가 살아난다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다"

임진왜란을 치룬 선조는 전국에 영을 내려 전화로 피폐된 전답과 무너진 가옥을 보수케 하고 세금을 탕감하여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자 고난과 불안에 허덕이던 나라의 기틀이 어느정도 안정되었다. 

이때 함안에 돌생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그의 성이 돌가이고 이름이 생원인 것이 아니고 이 고을에서 코흘리는 어린아이들도 알만큼 유명한 하영춘의 별명인 것이다. 

돌생원이 염산골 어귀를 달아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 가려는데 갑자기 울부짖는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그 곡성이 너무나 자지러지게 들려오므로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그 소리는 함안 땅에서도 만석군으로 이름난 최부자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들려 나오는 것이었다. 

돌생원은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발길을 돌려 최부자집 문전으로 걸어갔다. 대궐문이 부럽지 않은 큰 대문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집앞에는 동리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서로 수근대고 있었다. 아니 왠일인가? 앞으로 다가간 돌생원이 한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어? 돌생원님이군. 지금 최진사댁 아가씨께서 운명하셨다오"

"뭐라구?"

 돌생원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했다. 
 
중국의 양귀비처럼 아름답던 혜용아가씨가 죽었다니 이보다 더 큰 아까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땅을 치고 울 수야 있겠는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려면 정중한 문상을 해야한다. 이렇게 혼자 생각을 한 돌생원은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틈을 누비고 최부자네 후원 별당 앞에까지 가게 되었다. 과연 평소 혜용아가씨가 쓰던 별당 안에는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다. 검은 붓으로 그린 열두 폭 병풍이 둘려있고 그 앞에는 향촛대가 대낮인데도 타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돌생원이 마악 짚신을 벗고 별당으로 올라서려 할 때 우람한 손이 갑자기 그를 떠밀었다. "여보. 당신은 여기 뭣하러 왔소?" 돌생원은 예기치 않았던 일이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최부자집의 청지기인 달삼이가 왕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는 것이다. 

"왜 그러나? 문상을 왔네" "뭐라구? 돌생원은 필요없어 여기가 어디라고 빌어먹을 강아지처럼 기어온단 말야!" 청지기가 멋대로 지껄이는 말에 돌생원은 기가 막혔다. 자기는 그래도 양반의 씨인데 한낱 하인놈이 해라를 하며 잔뜩 모욕을 주다니. 가뜩이나 심술 사나운 성질을 건드려 놓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상놈이 양반을 모욕 했으니 관가에 송사를 내면 꼼짝없이 붙들려가 같은 양반인 원님에게 형벌을 받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놈! 이놈이 양반을 쳤다!"다시 돌생원의 큰 소리가 넓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되면 일의 영문을 알 수가 없게 된다. 분명 때린 사람은 돌생원인데 그가 도리어 맞았다고 소리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한창 이렇게 소동이 일어나니 최부자집의 온 식구와 친척들, 그리고 문상객들이 떼어 말리고 야단법석이 났다.

분향을 끝내고 화로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피던 돌생원은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최부자를 뵙겠다고 간청을 했다. 그때 최부자는 하나뿐인 외동딸이 원인 모르게 죽자 너무 상심을 하여 넋을 잃고 사랑방에 몸져 누워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히 키웠고 사랑하던 딸이 처녀로 급사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처음 돌생원이 보자고 할 때는 핑계를 대고 사절했지만 그가 딸을 살리겠다고 하자 대뜸 달려 나왔다. 

"뭐라구? 자네가 내 딸을 살려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예,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소생시킬 묘안이 있습니다" "진정이렸다?" "예" "그렇다면 오죽 다행인가 만일 못한다면?"'소인에게 반나절의 시간만 주시면 기필코 따님을 소생시키겠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놈의 목을 드리겠습니다."

"좋다. 혜용이가 살아난다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다." 돌생원은 자신있게 수작을 건내고 나서 곧 혜용아가씨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장구 하나를 갖다 달라고 청했다. 

하인이 이상스럽다는 듯이 장구를 하나 갖다 주자 방안에서 문을 잠구더니 두둥둥 북소리를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괴이한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초상집에서 장구소리가 흥겹게 울려 나오다니... 마당에서 서성이던 모든 사람들은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 중 성미 급한 문중 사람들이 최부자에게 당장 달려갔다. "숙부님! 세상에 이럴수가 있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고 가뜩이나 슬픈 판에 장구소리를 울리다니... 저놈이 필시 미친 놈입니다.

최부자는 사랑방에 누워 있으면서도 어서 딸이 소생했다는 소식이 있기를 마음 조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해가 서산으로 기울 기 시작했는데도 아무런 전갈이 없으니 애가 바싹 탔다. '내가 그 파락호 같은 놈한테 속은 것이 아닌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는데......오직 살리려는 마음 때문에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겠그나.' 이렇게 생각하니 더욱 돌생원의 장담이 못믿어지고 의심이 더럭 났다. "여봐라!"기어코 최부자의 거친 음성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머슴이 대답을 길게하자"당장 별당으로 가서 그 놈을 포박하라고 일러라!" "예? 무슨 분부시온지요?""뭘 꾸물거린단 말이냐. 그놈이 있는 별당 아아니 별당에 있는 그놈을 죽도록 물고를 내라니까!"머슴이 뜻을 알 수 없어 지체하자 최부자는 때려 죽이라고 불같은 분부를 내리는 것이다. 

그때였다."멈춰요!"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두 물러 가세요. 분명히 혜용이는 살아났어요."하는 소리와 함께 꽃같이 아름다운 처녀가 사뿐사뿐 걸어 나오질 않은가.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아!하고 소리를 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니 너무도 신기한 일이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떠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 돌생원이 방으로 들어 갔을 때 안에 놓인 화로에 이상하게 시선이 갔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타다 남은 숯덩이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날씨가 추워서 덜탄 숯불을 방에 들여놓고 잠을 잔 것이 냄새를 맡게 되어 잠시 중독 상태에 놓인 것이었다. 그걸 모르고 집안에서는 죽었다고 난리를 쳤지만 돌생원은 시간이 흐르면 깨어난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장담한 것이었다. 이쯤 되고 보니 돌생원은 일약 최부자의 은인이 되었다. 

최부자는 딸이 소생했다는 전갈을 듣고는 버선발로 달려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고맙네. 고마워! 자네는 우리 딸의 은인이야 은인일세." 최부자는 연실 돌생원의 등을 두드리며 감사를 했다. 그 얼마후 최부자 집의 넒은 마당에는 높다란 차일이 쳐지고 초례를 지내는 풍악 소리가 흥겹게 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최부자의 외동딸 혜용과 돌생원의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혼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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