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공주는 왕비릉을 만들자며 치마폭에 흙을 담아 봉분을 쌓아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는 14호 국도를 타고 장안사 쯤에 이르다 보면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 하근마을이 나온다.이곳 국도변 바로 옆에 소나무 숲이 있는 작은 동산이 있다.
 
먼 옛날 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곳으로 여기에는 망국으로 인한 한 가족의 비극과 아름다운 효행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 온다.
 
삼한시대 말엽인 5세기 쯤.지금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으나 인근 신라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됐다.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명의 공주를 데리고 탈출,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이르게 됐다.그러나 여기에도 이미 신라의 손길이 뻗쳐 왕비와 아홉 공주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을 숨기고 농사와 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기를 몇달,왕과 왕자들에 대한 근심이 쌓이고 몸에 익지도 않은 농사일에 지친 왕비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어 숨지고 말았다.

놀람과 슬픔에 어찌할 줄 모르던 아홉 공주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었다.그리고는 제각기 이웃 마을에 흩어져 살며,매년 음력 3월 보름마다 무덤가에서 만났다.
 
어머니의 무덤이 초라해 보였던 공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어머니 무덤을 왕비릉으로 만들자며 만날 때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치마폭에 흙을 담아 봉분을 쌓았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봉분은 점차 커져갔고,아홉 공주들의 변함없는 효심이 어느듯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들이 살고있던 마을의 부녀자들도 해마다 그날이 되면 왕비의 무덤가에 모여 왕비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왕비릉을‘딸아이 무덤’이라고 부르는 기룡리 주민들에 따르면 불과 수십년전만 하더라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날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이곳 무덤가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며 아홉 공주의 효행을 기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왕비릉이 있었음직한 동산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상태로 봉분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특히 이곳 동산이 수십년전 특정 문중의 소유로 넘어간 뒤에는 외부인들의 출입도 뜸해진 상태라 옛날의 사연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게 됐다.
 
한편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바닷가에 시랑대라는 높다란 바위 절벽이 있다.

용궁사 뒤 바위언덕에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돼 있다. 시랑대 일대는 일제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동해남부 연안의 제1 명승지로 알려졌던 곳이다.1733년 시랑벼슬을 하던 권적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돼 왔을 때 이곳의 경치에 반해 바위에 자신의 이전 벼슬을 따 시랑대라는 글자와 시를 새겼다.  이후 이곳은 시랑대라 불렸고 많은 문인들이 한시를 바위에 남겼다고 전해진다.
 
권적이 부임하기 전 이곳의 이름은 원앙대였다고 한다.거기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어느 여름철에 가뭄이 심해 마을 사람들이 미랑이라는 젊은 스님을 초빙해 원앙대 아래서 기우제를 올렸다.

미랑스님은 기우제가 끝나자 원앙대에 홀로 앉아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해질 무렵이 되자 원앙대 밑의 동굴을 통해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자태의 용녀와 훤칠한 풍모의 미랑스님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어느덧 아기까지 잉태하게 됐다.용녀는 용궁의 눈을 피해 원앙대 위에 자리를 펴고 진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해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용녀의 신음소리는 아버지 동해용왕의 귀에 들어갔고,자신의 딸이 인간과 불륜을 범했다는 사실에 크게 노한 용왕은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안타깝게도 용녀는 막 낳은 아기의 탯줄을 끊지도 못하고 성난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마침 바위 뒤에서 출산을 지켜보던 미랑스님은 용녀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자신의 목숨도 지키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처절한 광경을 보고 불쌍히 여긴 옥황상제는 천마를 내려보내 용녀와 아기를 하늘나라로 데려와서 그 곳에서 살게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토록 뛰어났다는 시랑대의 절경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60년대 이후 사람들이 바위를 마구 캐내 경관이 상당부분 훼손되면서 수십편이 넘었다는 바위에 새겨진 한시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여기에다 인근 용궁사에서 여러 건물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시랑대로 돌아가는 길까지 막아 현재 일반인은 접근조차 어렵게 돼버렸다.
 
애잔한 설화와 빼어난 경관이 조화를 이룬 시랑대를 이처럼 망가뜨린 것은 두고두고 한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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