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니 아부지하고 황새보 논에 다녀와야 쓰겠다.”

어머니는 간밤에 쏟아진 단비에 너무 좋으신 모양이다. 모내기한 논이 바짝 말라서 논이 쩍쩍 갈라질 참인데 밤새 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많은 양은 아니라서 둠벙에 고인 물을 퍼서 논에 대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엊저녁에 과음하신 아버님은 일어날 생각도 안 하셨다. 어머님의 말뜻은 아버님이 물 좀 대달라는 것인데 우리 형제들도 도매금으로 넘기셨다. 동생들은 노란 좁쌀 같은 눈곱을 떼어내며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500년 전통을 이어받은 가문의 장손인 내가 먼저 아버지보다도 먼저 밥상머리에 척 앉았다.

그 당시 우리 집 논은 황새보 말고도 서너 군데가 더 있었다. 원동과 운암들 논은 저수지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물 걱정은 안 했다. 요즘처럼 마구잡이로 산을 깎아 들판을 메우는 시절도 아니었다. 하지만 냇가를 따라 공장이 들어서면서 논으로 흐르던 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빗물이라도 가둘 요량으로 아버지는 논 귀퉁이에 둥그렇게 한길 정도의 둠벙을 만드셨다. 어머니는 한 삽이라도 논두렁을 깎아 땅을 넓혀야 할 판국에 애먼 논을 버렸다고 3년하고도 석 달 열흘간은 아버님을 닦달하셨다.

“원기야! 물 푸거들랑 매운탕거리도 챙겨라.”

황새보 논은 가깝지 않은 한 마장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막내는 제 키만한 빈 주전자를 들고 대문 앞에 나와 우리를 기다렸다. 사실 그때 우리는 매운탕보다야 들판에서 재밌게 장난칠 것에 더 관심이 쏠렸을 때였다. 그 장난거리라는 게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바로 개구리잡기놀이였다. 나는 개구리를 잘 잡는 것으로 동네에서도 소문났었다. 작은놈보다는 큰놈이 잡기가 훨씬 수월했다. 작은 것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큰 것들은 물 많은 둠벙 쪽으로 튄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원기야! 니 아부지 원기가 많이 떨어졌스야….”

내 이름은 원규인데 어머님은 ‘원기’를 강조하셨다. (우리 집에는 둘째는 연규, 막내가 인규지만, 어머님은 ‘연기’ 혹은 ‘인기’라고 발음하지는 않으셨다) 물론 어릴 적에 아버님께서 군대에서 휴가 나오실 때마다 방바닥에 그득 쏟아놓았던 ‘원기소’ 때문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때의 그 고소한 맛이란 동생들은 아마 몰랐을 테니까. 나는 빡빡 민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동생들을 줄 세우고 오늘 논에 가서는 절대로 말썽을 피지 말 것도 간곡하게 당부했다.

어린 남동생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역시 만만한 게 개구리였고, 여동생은 소금쟁이와 물방개 등 시시때때로 좋아하는 게 변했다. 아버지께서 둠벙에서 물을 퍼 올리시는 동안 우리는 개구리를 잡아 똥구녕에 보릿짚을 끼워 바람을 불어넣었다. 뭔 영문인지도 모르며 개구리는 입을 앙다물고 오줌을 질질 싸면서 멀뚱히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는 정성스레 돌탑을 쌓고 꼭대기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기도했다. 동생들도 두 눈을 감고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지성이면 감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들의 기도에 응답하듯 논바닥으로 물이 괸다. 

아버님은 둠벙 안에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펴며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둠벙의 물을 퍼낼수록 물고기는 가운데로 바글바글 몰렸다. 송사리와 붕어 그리고 미끄덩거리는 미꾸라지와 뱀장어까지 바글바글했다. 가까이서 보니 자기들끼리 치고받아 부딪친 상처로 온몸이 시뻘겋게 변했다. 요즘의 고위직 청문회장이 바로 그 둠벙 속과 똑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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