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림의 신하다"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않아

박제상(朴堤上 서기363-419 )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 사람으로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의 두아우를 기지를 발휘해 구하고 순국한 충신이다.

그의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실려있을만큼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 박문량(朴文良)의 아버지 이기도 하다.

박제상은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5세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영해(寧 海)이며 호는 관설당이다. 박제상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미추왕(味鄒王 261-284)의 동생인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 내물왕(奈勿王 356-402)이며, 내물왕의 동생이 실성왕(實聖王 402-417)으로,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리므로 강압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내물왕의 장자 눌지(訥祗)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녀 실성왕이 도외로 치고, 둘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셋째 미사흔(未斯欣)은 왜(倭)로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 박제상이 주축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과 실성왕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실성왕이 눌지왕(訥祗王 417-458)에게 양위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박제상이 고구려로 가서 "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 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 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 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 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 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딸 아기(阿奇)와 셋째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 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차녀 아영(阿榮)은 가정을 위하여 굳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 남동생이 바로 백결선생이다. 눌지왕이 듣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로 하였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 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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