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의 느릅나무밑에서 100일동안 자식 얻게 해 달라고 기도

"둔내면 두원리에는  수령이 4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느릅나무 한그루가 있다.

이 나무에는 자식두기를 지극히 원했던 어느부부의 애절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충청도 땅에사는 어느 부부가 가정은 다복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자식이 없어 늘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두원리에 있는 느릅나무를 찾아가 기도를 드리면 효험이 있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오게 됐다.
 
부부는 온정성을 다해 이 나무밑에서 100일 동안 자식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백일째 되던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들 부부에게 옥동자를 줄 것을 약속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정말 부인에게는 태기가 보이고 그렇게나 그리던 아들을 열달만에 낳았다. 이들 부부는 금이야 옥이야 하며 지극정성으로 늦게 본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이 아기는 태어난지 3년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들 부부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부부는 행여나 싶어 충청도에서 강원도 두원리 느릅나무까지 헐레벌떡 쫓아 올라왔다. 느릅나무에 가까이 가보니 과연 그 나무는 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하도 신기해 마을사람들에게 이 나무가 언제 이렇게 됐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날 죽었다는 것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이 나무는 자신의 아들이 죽던날부터 다시 새잎이 돋으면서 소생하기 시작했다는것이었다.

그렇다면 신령님의 이들 부부를 잠시 위로해 주기 위해 이 나무의 생명을 빌려 주었단 말인가. 아무튼 이 나무는 지금도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채 두원리를 굽어 보고 있다.
 
한편 둔내면 삽교리에 살던  안삽교는 문무를 두루 갖춘데다 백과사전같은 박학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가공할만한 초능력의 소유자로 축지법을 써 횡성에서 서울을 당일로 갔다오기도했다.
 
어느날 아침 그의 부인이 점심걱정 하니 “오늘 점심은 한양에 가서 먹게될테이니 걱정마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라고 그의 부인이 의아해 묻자 그는 “한양을 당일치기하는  판에  어느틈에  집에 와서 점심을 먹겠소”라고 하더니 쏜살같이 사립문을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그의말을 믿지 않았다.
   
한양이 어디 둔내장거리 갔다오는 것도 아닌데. 저녁때가 되어 찬바람을 몰고 돌아온 안삽교는 이마에 땀이 촉촉이 나 있었다. “정말 한양을 다녀오신거유?” “암 갔다오고 말고 내당신이 안믿을까봐 육 의전에서만 살 수 있는 비단신발을 이렇게사왔소”사실이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번은 그는 청일면에 있는 봉복사에 놀러와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큰불이 났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거였다.“어디서 불이났다는 거요?  이 근처요 아니면 먼 곳인가요?” “합천 해인사 본당이 타들어 가는군요” 그러면서 봉복사 뒤뜰에 있던 물한동이를 주문을 외우더니 휙 뿌렸다. 한참후 자리로 돌아온 그는 이제 불이 다꺼졌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비관천지법(悲觀天地法)’과 ‘천리안(千里眼)’으로 세상일들을 처리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힘이 장사여서 능히 호랑이를 제압할만 했다. 어느날 밤 안삽교가 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그의 엉덩이를 핥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잽싸게 호랑이의 목덜미를 웅켜잡아 무릎에 끼고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으니 호랑이는 꼼짝못하고 용을 쓰는데 안삽교의 나막신이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고 한다. 용변이  끝났을때 거의 질식상태 인 호랑이를 변소에서 끌어내 숲속에 버렸다고 한다.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한 효자로 그의 아버지가 눈동자에 항상 핏줄이서서 고생을 했는데 누가  말하기를 뱀해에 난 분이라  호랑이  눈썹을  태워서 바르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넌지시 일러 주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산으로 달려가 호랑이의  눈썹을  뽑아오는 그런 기인이었다.

그가 둔내에 들어와 산 것은 1768년이었으며 그는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주경야독’ 생활을 하다 만년에는 지방농토개발과 산업부흥에 힘을 쏟았다.

그가 죽은후 부락민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그의 인생관은 선비라면 당행지도가 있어야 되며 어떤 곤궁한 처지라도 자득지책을 가지고 천지간에 부조리없는 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저술한 만록(漫錄)이 18편이 전해지고 있으며 만록에는 인간성의긍정, 인간의치부, 인간의갈등 등이 잘 그려져있다.

또한 그는 ‘북벌론’을 주장해 민족의자주의식과 주체의식을 일깨웠으며, 중국주자학의 명분론을 부인하는 작품활동을 펴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안석경(安錫儆)이었고 삽교는 그의 호였다. 그가 살던 마을이름은 그의 호를 따 ‘삽교리’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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