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입대하셨던 아버지께서 포병학교 상사로 명예제대를 하신 건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 일이야 바싹하게 꿰찬 분이지만, 세상 물정에는 맹문이라서 제대 후 첫 사업(?)은 짐받이 자전거에 생선 궤짝을 바리 바리 싣고 시골로 다니면서 파시는 생선장사였다. 외상도 잘 주시고 맘이 약해 큰 이문은 남기지 못하셨고, 인심까지 후해 미처 팔지 못하고 남은 생선은 몽땅 불쌍한 시골 할머니들께 나누어주셨단다. 하지만 갈치만은 집으로 꼭 가져와 토막을 내서 지붕 위에 꼬들꼬들하게 말렸다가 겨울철까지 밑반찬으로 저장해 구이, 조림, 찌개 등으로 썼다. 크기도 크려니와 비린내만 잘 잡으면 갈치만큼 맛있는 요리가 없다. 그런 갈치에 질려서 필자는 군대에서는 갈치에 손을 대지도 않고 옆 동료에게 주었다. 

친구들이 덩치가 커지자 봉사한답시고 우리 논으로 와서 일손을 거들었다. 아버님께서 생선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날만큼은 친구들도 생선을 원 없이 먹었다. 여름철에 가장 맛있게 먹었던 생선은 역시 준치였다. 어머니께서는 준치를 이용해 국, 만두, 자반, 찌개, 찜, 조림, 회, 구이는 물론 회무침과 만두까지 다양하게 요리 솜씨를 발휘하셨다. 어머니는 새참을 내오실 때면 준치 탕거리를 꼭 준비해 오셔서 큰 양은 솥에 끓이셨다. 모두 식욕이 왕성한 젊은이들이라서 입맛에 상관없이 준치탕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썩어도 준치’라는 옛말이 증명하듯 어떻게 요리해도 맛있는 생선이다. 다만 잔가시가 많은 게 흠이지만 전어처럼 맛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생선이다. 이름도 꼴뚜기 다음으로 유명하지만, 눈으로 보았거나 맛을 본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또 하나, 생선도 아닌 벼슬아치들이 세종로 1번지와 여의도동 1번지에서 서로 잘났다고 날뛰고 있다. 마른장마 통에도 그들끼리 부딪치며 난 상처로 썩은 내와 비린내가 진동한다. 며칠 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대한민국의 이인자 국무총리도 국회청문회에서 난도질당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인사가 만사라 했다. 국제 외교를 책임질 외무부 장관을 비롯한 굵직한 벼슬아치로 갈 후보자들이 마치 어물전 궤짝에 누운 생선처럼 보인다. 갈치처럼 너무 크면 토막 나고 준치처럼 쉽게 상하면 아예 경매장에 끼지도 못한다.

이런 이야기야 해도 해도 끝장이 안 난다. 재탕, 삼탕이라고 해서 약발이 없지는 않을 터, 해석하기 나름이니 부디 오해는 말고 이해한다면 남북통일도 앞당겨진다. 허튼소리라고 절대로 허투루 듣지 말 일이다. 생선장사 큰아들 입에서 치사 찬란한 쌍시옷 자 욕이 나올락 말락,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서 ‘참을 인(忍)’ 자를 세 번씩 곱씹으며 하는 소리다. 비록 제사상에 올라가지는 못해도 갈치와 준치는 속이라도 깨끗해 맛있지만, 맛까지 지지리 없는 벼슬아치들은 속까지 새까만데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어물전 망신 다 시키고 있다.

“끼니는 거르지 말아라.”

이따금 드리는 안부 전화에도 어머님은 격하게 반응하신다. 몸뚱이 열심히 굴리면 끼니야 거를 일 없겠지만, 세상살이는 맘과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신 구순에 가까워진 어머님이시다. 환갑을 넘긴 큰아들이 아직도 천덕꾸러기가 돼 자나 깨나 걱정거리인 모양이다. 다음 주면 아버님 기일이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별로 말씀은 없으셨지만, 행동으로 남겨주신 교훈이 캐면 캘수록 자꾸만 나온다. 아버님께서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싫어하셨다. 하지만 자식들과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대하셨던 분이다. 지금도 아버님께서 옛집 툇마루에 앉아서 혼자 바둑(시쳇말로 혼바)을 두고 계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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